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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인 이야기

by 전선훈

주방 옆 작은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이야기는 평범한 일상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필요한 아주 소중한 이야기 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아이들 이야기, 회사와 상사에 대한 이야기, 시국에 관한 이야기, 남편에 대한 이야기 등 영업시간이 끝나도록 술 한잔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갈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하는 곳이 우리 사랑방의 역할이고 그런 역할을 해주는 곳이 아파트 단지 내에 있다는 것을 고마워하며 가는 손님들도 간혹 있었다.


자주 소규모 모임이 생기기도 하고 때로는 예약을 통해 그들만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특별한 시간을 보내려는 모임이 많아지니 고정 손님이 늘어나는 효과를 누리는 건 덤이었다.


아파트 단지의 특성상 대부분 같은 또래의 자녀들 어머니 모임이 많았는데 특히 대학 입시가 다가오는 달에는 서로가 알고 있는 정보 공유를 위한 모임이 주를 이루는 것 같았다.


오랜 시간을 해외에서 생활하다 한국에 들어온 나에게 한국의 대학 입시 문화와 관련된 얘기들은 좀 생소하게 들렸다.


모임의 리더인듯한 분이 설명하기를


“수시는 학생부교과, 학생부종합, 논술, 실기/실적 전형이 있고 정시는 수능위주, 실기/실적 전형 외에 대학마다 기회균등, 농어촌, 한부모, 국가 유공자 전형등이 있으며 …”


정말 다양한 제도가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고 들어도 이해가 안 되는 제도들 뿐이었다.


물론 나도 대학시험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대학을 다녔지만 지금보다는 아주 단순한 제도였고 그저 시험 점수만 좋으면 원하는 대학은 어디든 갈 수 있었기에 특별한 정보가 필요하지 않았고 점수에 맞춰 지망 가능한 대학과 지망 가능한 학과가 인쇄된 자료를 보면서 담임 선생님과 진학상담을 했던 기억이 났다.


한가인.


아주 유명한 탤런트 겸 영화배우이지만 입시철이 다가오면 대학입시를 앞둔 학부모들에게 자주 오르내리는 이름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처음에 이 이름을 들었을 때는 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요즘엔 별로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애들 키우며 사는 아줌마로 가끔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이 전부인 것 같았는데 입시철이 다가올수록 자주 오르내리는 이름 중 단연 최고였다.


“어제 입시 학원에서 강의가 있었는데 한가인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더라고. 교육부에서는 교육방송(EBS)에서 사용하는 교재의 비중을 높인다고 하지만 입시 강의 전문가들은 다른 얘기를 하더라고. 듣고 오니 더 마음이 심란해지네.”


“에휴. 한가인만 된다면야 뭐든 못하겠어. “


“나도 같은 생각이야. 한가인만 된다면 단기 고액 과외도 해야 할 판인데…”


친목의 모임이지만 잠재적 경쟁자의 부모들이라 알고 있는 고급정보는 거의 얘기를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공통의 주제는 단연 한가인이었다.


대체 한가인이라는 연예인이 대학 입시철 단골메뉴 이름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생겨 인터넷 서핑을 해봤지만 입시와 관련된 내용은 아무것도 나와있지 않았다.


어쩌면 입시를 앞둔 모임에서만 사용되는 특별한 은어일 것 같은 생각은 들었지만 학부모가 아닌 이상 그 의미를 알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화중인 손님들에게 끼어들어 가르쳐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와 크게 관계없는 일이니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지만 여전히 남는 궁금증은 어쩔 수 없었고 조만간 입시와 관련된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는 지인에게 물어보기로 마음을 정하니 한결 편한 마음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자 집에 들어가기 전 한잔하고 가려는 손님들이 많아졌고 한가인 얘기를 나누던 팀의 목소리는 작아졌고 더 이상 그들이 하는 얘기를 들을 수가 없었다.


한가인 팀은 꽤 많은 맥주와 음식을 드셨고 모임의 리더인 듯한 분이 계산을 하고는 밝게 웃으며 가게를 나갔다.


대부분의 손님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고 마감 정리를 준비할 즈음에 한가인 얘기를 나누던 팀원 중 두 명이 문을 살짝 열며 들어가도 되냐며 웃고 있었다.


“네. 아직 문 안 닫았으니 들어오세요. “


“집에 가기 전 둘이서 잠깐 할 얘기가 남아서… 간단히 마시고 갈게요. 호호호. “


“네. 천천히 드시고 가셔도 괜찮아요.”


마지막 손님과 나는 하루의 마무리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진행했다.


그들은 못다 한 이야기로 하루를 마감하고 나는 주방을 쓸고 닦고 하면서 끝낸다.


한가인에 대한 궁금증을 끝내 참지 못하고 손님에게 다다가 살며시 물어보았다.


“혹시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호호호. “


”아까부터 얘기하시던 한가인이 대체 무슨 뜻이에요? “


”아… 한가인요? 우리 학부모들의 은어인데…그 의미는 아주 간절한 마음을 담긴 뜻이에요. 호호호 “


“그 의미는 바로…”


한 번에

가 자

인 서울


”아하…그런 뜻이었네요. 하하하. 이제야 속이 후련하네요. 얼마나 궁금했는지… 하하하. “


”재수를 안 하고 바로 인서울 대학을 갔으면 하는 모든 학부모들의 간절한 마음이죠. 호호호. “


사실 직장생활을 할 때에도 줄임말이나 은어를 많이 사용하곤 했었다.


NATO(No Action Talking Only)


ASAP(As Soon As Possible)


BRM(Business Review Meeting)


ETD, ETA……


그 외에도 비즈니스와 관련된 수많은 줄임말과 은어들이 지금도 사용되지만 학부모들도 그들만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 은어와 줄임말로 복잡한 사회생활의 한 축을 이어가고 있음을 실감하면서 하루를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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