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외면해선 안 되는 이야기

<반딧불이의 묘>

by 머묾

그럼에도 외면해선 안 되는 이야기

<반딧불이의 묘> ★★★★★★

'부디, 누구의 잘못도 아닌 그곳에서 편히...'



반딧불이.

작은 손에도 쉽게 바스러지는 존재

작디작은 존재인 그들은

예쁜 빛을 내지만, 오래 살지 못한다.


어쩌면 그들은,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는 게 아닐까



세이타와 세츠코의 행복도

그저 작은 행복도 좋았던 그들이지만

가혹하게도 세상은 그런 행복조차 오래 주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보려 빛을 내지만

끝내 짧은 생뿐인 그들.



세이타를 보며,

어린 세츠코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모습에

세이타 또한 어린아이임을 다시금 떠올릴 때면

그저 이런 상황이

가슴이 아플 뿐이다.





<반딧불이의 묘>는 지브리 영화 중

작품성 대비 가장 언급이 없는 영화이다.



전쟁 속의 아이들의 고통을 파격적으로 표현하는

심도 있는 연출이 크게 평가받으며

단순한 애니를 넘어 영화사에 남을 걸작으로 꼽힌다.


특히 로튼 토마토 점수를 무려 100%를 기록하며 작품성을 증명했다.



전쟁의 피해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며

일본의 입장인 영화의 스토리는

사람들의 오해를 불러올만하기도 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사람들의 평이 궁금해진 나는

여느 때와 같이 각종 리뷰들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생각, 평가, 해석 등이

궁금했던 나에게 돌아온 건.


보지도 않은 사람들의

일본의 피해자 코스프레 영화라는 등의 혹평.



설령 봤다 할지라도,

내겐 절대 도달할 수 없을 그런 부분 밖에 없었다.



단지 나와 다른 생각이었단 이유는 아니다.



최저점의 평을 남긴 사람들은 크게

1. 주인공이 답답하다는 점

2. 전쟁 미화이자 피해자 코스프레라는 주장

두 가지로 나뉘었다.



그들을 욕하는 건 아니지만,

아마 그런 평을 남긴 분들은

영화의 진정된 결말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1. 주인공이 답답하다는 점



주인공인 세이타의 행동들에

일부 관객들은 세이타를 탓하며

영화가 답답하다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세이타의 행동들은

어른들에게 보살핌을 받지 못한

14살의 어린아이였을 뿐이다.



중요한 건 그때 그 선택을 왜 하지 못했느냐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던, 그들이 놓인 환경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



집과 부모를 잃은 14살의 어린 소년에게,

어째서 4살 여동생까지 지키지 못했냐고.

전쟁을 겪어보지도 않은 우리 중

어느 누가 할 수 있겠는가.



2. 전쟁 미화이자 피해자 행세물이라는 주장



한국 관객 사이에서

잘못된 낙인이 찍혀 생긴 오해이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선 어쩔 수 없이 일본과 전쟁에 관해선

민감한 주제이기 때문에.



허나, 그렇기에 생기는 오해도 있다.

전쟁이라는 민감한 주제가

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별점 테러가 이루어지는 현실



그럼에도

1점 테러를 당했음에도 3점 이상이 뜨는 것을 보면

한국에서도 제대로 본 사람들은

고평가 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예시로,

미국에서 고평가 한다는 점이 있다.

미국 또한 진주만 공습 때문에

일본이 피해자 행세를 하는 걸 매우 싫어하는데,



이런 고평가는 미국에선 이 작품을

피해자 행세물로 보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특히 미국을 비롯한 서양권에선

타카하타 이사오의 대표작으로

다른 작품을 모두 제치고

반딧불이의 묘가 꼽힐 정도다.



단순히 해외의 평가만으로

이 영화가 피해자 행세물이

아니라는건 아니다.



영화 내내 주인공 남매와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대조하며

남매의 아픔을 표현하는 방식이였다.



단순히 전쟁의 피해를 표현하며

일본이 전쟁의 피해자라는 내용이 아니다.



오히려 같은 패전국의 사람임에도

누구는 좋은 집에서

좋은 쌀로 밥을 해먹고

여행도가며 인생을 즐기지만,



누군가에겐

난로에 쓸 보급받은 숯으로

가족의 시신을 태워야만했고,

배고픔에 돌을 삼켜야만했다.



이러한 대조되는 장면들은

영화가 피해자 행세물의 영화가 아니라는 것을,

전쟁 상대 국가를 비판하는게 아닌

오히려 같은 나라 내에서의 문제를 보여주는

장치였다.





안타깝지만

이 영화의 엄청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흥행 기록과 명성은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OTT로 접한 나는

오히려 1988년의 이 영화를

요즘 시대의 OTT에 적합하다 생각한다.



그 이유는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에 있다.



머리에 돌을 맞듯

마지막 엔딩을 본 후,

영화의 첫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서 본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영화관에서 봤다면 느끼지 못했을 경험..

오직 ott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내게 이런 감정을 준 영화는

몇 안되지만,


다시 보라면 못 볼 거 같다.



난 더 이상

웃는 세츠코의 모습을

다시 볼 자신이 없다...




부디, 누구의 잘못도, 누구의 탓도,

누구 때문도 아닌 그곳에서 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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