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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영 Jun 08. 2022

18. 고개 숙인 할미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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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삶이든 세상살이에 떠밀려 속절없는 세월을 보내겠지.

 그러다 어느 날 백발의 꼬부랑 할미꽃을 보자 ‘아! 다 부질없는 한여름 밤의 꿈이었어.

 사랑도 미움도 한낱  바람결에 묻어 날아가는 먼지와 같은 것을. 하도 무겁디무거워  소의 굴레 같았던 세월도 순식간에 산 넘어 날아가 버리고 마 는 것을.’ 하며 서러워하겠지.

 ‘이제 허리 좀 펴시오. 마치 죄인 같아 보여 싫소이다.’ 하며  곧 천상으로 날아가 버릴 듯, 이제는 그 고개 숙인 자줏빛 꽃도  사라지니, 꽃도 아니게 하얗게 되어 버린 머리만을 이고 있는  할미꽃에 눈물을 흘리리라. 


 하나, 슬퍼 마시오. 그 또한 덧없는 것이라오.   

 그래도 간간이 기쁨이, 웃음이, 희열이 있어 행복하지 않았소?   

 그리고는 초라한 하얀 할미꽃에게 말하리라.

 ‘다음 생에는 화려한 모란이 되어 보시오.  그리하여 항상 반짝이는 왕관을 쓰고 뽐내며 눈을 내리깔고 살아 보구려. 모란 이 된 왕자님을 찾아와 곁에서 소담스러운 꽃이 된 작약이 항 상 지켜 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란단 말이오.  ’    

 하지만 모란도, 작약도, 비바람에는 비명도 못 질러 보고 떨어져 퇴색된 모습으로 볼품없이 뒹군다는 것은 알아 두구려.   

 차라리 그보다는 폭풍이 몰아쳐 와도 서로 부둥켜안고 이겨  내는 찔레꽃 무리의 삶이 행복하다 할지 몰라도, 그 또한 헛된  생각이라오.

 꽃은 열흘 이상 붉을 수 없고 달도 차면 기운다 하지 않았소. 인간을 비롯하여 만물의 화려함은 모두 한때에 불과하다오.

   ( '홀로 방황하는 이들에게' 중에서)


 소나무는 세월이 갈수록 더 단단하고 멋지고 그 가치를 더해간다.

 그러나 사람은 그 반대라서 기분 나쁘다. 그냥 기분 나쁜 것이 아니라 늙음이라는 게 가까이 올 수록 젊음에서는 없었던  불편함이 많아서 더 기분 나쁘다.


 저녁 무렵에 슈퍼에 갔다.

 딸기가 먹음직스러워 보고 있노라니 저쪽에서 남자 판매원이 "두 팩에 만원 이오." 하고  소리를  친다. 나는  살까 말까 망설이느라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는 가까이 오며 "못 알아듣는군."하고 중얼거리더니  큰 소리로 "하나에  7500원인데 두 팩에 만원이면 5000원 깎아 주는 거라고요." 하며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알아 들었거든요." 하고 쏘아붙이려다  참았다. 기분 되게 나쁘다.

 평생을 참고 살아온 것이 몸에 배었나 보다.  '쓸데없이 아무 때나 참는 멍청이가 되었나 보다.'라는 생각이 스치니 더욱 기분 나쁘다. 

 밖에 나오니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 그 타오르던 태양도 때가 되면 서산으로 사라지지.

 

 휴대폰으로  택시를 불렀다.

 기사가 "누가 불러 주었어요?" 한다.

  "내가 불렀는데요. 왜요?"

  "어르신이 할 줄 아세요?'

 이런, 기분 째지게 나쁘다.  '내가 그것만 할 줄 아는 줄 아느냐?  젊은이가 하는 것 다한다. 다해.'

 생각해 보니 못하는 것이 말할 수 없이 많다. 그 또한 기분 나빠진다.

 이십 년 전에는 노란 방개 차를 사고 싶었다.  직장인이 아니었다면 샀을 텐데  참았다.  차를 계약하려는데 깎아주지 않느냐고 했더니 연예인이나 해 준다고 했다. "나도 연예인인데요." 하니까 대꾸도 안히고 웃었다.

 이제는 운전하는 것을 아이들이 불안해해서 차를 없애고 택시를 타기로 어렵게 결정했는데 기사들이 내 마음을 몰라주고 있다.  실은 노란 스카프를 바람에 휘날리며 빨간 오픈 카를 운전하고 싶은데 못하니 매우 기분 언짢다.  아들에게 말했는데 들은 척도 안 하고 웃기만 하니.


 병원에 가니 내 몸에 고장이 났건만 나에게는 아예 설명하려 하지도 않고 보호자를 찾는다. 아이들보다 병원에 다닌 경력이 많아서 내가 더 잘 알아듣는데 말이다.

 기분이 왕창 나빠서 나는 계속 혼자 다닌다. 두 다리가 멀쩡하고, 잘 보이고, 잘 알아듣는데 보호자가 왜 필요한가 말이다.

 젠장. 머리를 빨갛게 물들이고 얼굴에 보톡스 맞아 뺀질뺀질하게 해 볼까나?


 하나 사실은 움직임이 굼뜨고, 눈이 침침하고, 여기저기 쑤셔서 잠을 설치고, 머리에서는 맴도는데 입에서는 단어가 빨리 나오지를 않는다.  

 치매 검사를 해야 될 때라고 해서 갔더니 의사가 기억력 검사를 해 보자고 한다. 살짝 기분도 언짢고 자존심 상해서 '아니,  얼른 생각이 안 날 때는 있어도 기타 악보를 금방 외워요.' 했다. 그래도 연세가 있어서 해보는 것이 좋겠단다.

  그놈의 연세, 연세라는 것은 애초에 누가 셈하도록 했는지,  그런 것도 기분 나쁘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왜 구해오라고 했느냐고, 수 백 년 간 지지고 볶고 싸움만 하던 춘추 전국시대를 통일했으니 늙기 싫었겠지. 욕심은 많아가지고, 늙고 죽는 게 자연의 순리인데 혼자만 오래 살려고 애썼군 해 왔다.

 그랬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한다.

 

 괜스레 기분이 나빠져서 심술을 부려보지만, 그래 보았자  나이 값도 못한다고 할 것이 되니  더더욱 기분 나쁘다.

 그래, 까짓것  이제부터는 그냥 웃자. 호호호.


 아무리 큰 소리 쳐봐도 다시 오는 봄에 할미꽃이 모란으로 화려하게  피어나리라는 희망은 가질 수 없으니.

 

 어느 날 손녀가 말했다. "할머니 냄새는 좋아, 그리고 할머니 품은 따뜻해."

 "그래, 모든 할머니 안에는 그윽한 향기와 따스한 온기가  가득하단다. 하여, 이 세상의 아픔을 다 품을 수 있지."


할미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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