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 일기 17
나이가 드니 눈물이 많아졌다. TV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주르륵 눈물이 흐른다. 점점 남성호르몬이 줄어들고 반대로 여성호르몬이 늘어나서 생기는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하니 이상할 건 없지만 그래도 왠지 쑥스럽다. 아내랑 같이 TV 보다가도 눈물 날 것 같으면 괜히 헛기침하거나 천장을 올려보거나 슬그머니 일어나 화장실 가는 척한다.
슬프거나 감동적인 장면이 나올 때 과연 아내는 어떤 모습일까 싶어서 슬쩍 훔쳐본다. 아무 표정이 없다. 아내는 이성적인 편이라 그러려니 했지만, 이런 슬픈 장면에서 울지 않는다고. 나랑 다르긴 다르구나 싶었다. 하긴 법학과 다닌 아내다. 법이 좋다고 했다. 법조문 한 줄만 봐도 머리가 어질어질한 나로서는 그저 혀를 내두를 뿐.
며칠 전, 아내가 출근하고 혼자 TV 보고 있었다. 스위스 융프라우 산악열차를 타고 가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곧이어 믿기지 않는 황홀한 경치가 나타났다. 그린델발트. 영화 [반지의 제왕]쯤에서나 나올법한 지명. 눈앞에 펼쳐진 온통 초록 빛깔 초원과 점점이 박힌 그림 같은 집, 순간 모든 게 멈췄다. 나는 황홀한 절경에 그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감동의 눈물이었다. 세상에 저런 곳이 다 있었구나, 지상낙원이 따로 없구나 싶었다.
이때부터 스위스는 해외여행 1순위 등극. 드라마 [도깨비]에 나오는 장면이다.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도깨비인 공유를 보고, 아저씨 능력이 이 정도면 저 결심했어요. 아저씨랑 결혼할래요, 사랑해요,라는 김고은의 대사가 있다. 나도 결심했다. 스위스 경치가 이 정도면, 저 결심했어요, 스위스 꼭 여행 갈래요, 사랑해요, 스위스. 악명 높은 물가만 빼고.
오늘도 변함없이 헬스장 트레드밀 위다. 요즘 제법 잘 다닌다. 하긴 운동하기 딱 좋은 날씨다. 덥지도 너무 춥지도 않다. 게다가 헬스장 창 밖은 참으로 아름답다. 단풍은 왜 이리 고운지, 햇살은 왜 이리 찬란한지, 유모차 타고 가는 아기는 또 왜 이리 귀여운지, 감동적이다. 그러다 휠체어를 탄 수척한 할머니, 왜 이리 쓸쓸한지, 80 넘은 시골 부모님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찬바람 부는데, 보일러 기름값 아깝다고 냉골방에서 계실 게 뻔한. 성질내며 제발 따뜻하게 계시라 해도 별일 없다, 걱정마란 말 끝에 미안하단 말을 덧붙였던 게 그제 안부 전화에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기어이 눈물이 주르륵 터지고 말았다. 트레드밀 타다 말고 고개 숙이고 얼른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