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와 전문성을 둘 다 가진 여성은 초인이거나, 부자이거나, 사장이다." 프린스턴대 교수로 한 때 오바마 정부 때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최측근이었던 Anne Marie Slaughter가 2012년 약 2년 만에 국무부를 떠나며 남긴 명언이다. 원래는 남편과 함께 국제정치 학자로서 활약하던 그녀는 국무부의 멈추지 않는 시계를 경험하고 나서는 "우리 이제 솔직해지자" 라며, "여성은 모든 걸 가질 수 없다" 라는 것을 인정한다.
10년도 넘은 페미니스트적 글이 왜 다시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10년이 넘어도 별로 달라진 것은 없기에 생각난 것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본부만큼 바쁘다 하는 주중대사관에서 세살 아이를 홀로 키워낼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 덕분이었다는 새삼스러운 자각 때문이기도 하다.
# 대사관 마을 식구들
켈리가 커 갈 수록 대사관 동료들은 켈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켈리는 대사 퇴임식에 화동으로 역할을 할 정도로 대사관의 한 식구였다. 사실, 우리나라가 가난했던 시절에 같은 해외 공관에서 근무한 외교관들은 서로 숟가락, 젓가락이 몇 개인지 알고 있을만큼 친하게 지냈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러한 문화가 사라졌고, 집에 초대하거나 하면 "혹시 나를 꼰대로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살짝 들 정도로, 세상이 바뀌었다.
그래도 직원의 개인 사정을 좀 더 관용적으로 받아주는 업무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다소 유난스러워 보이는 나의 행동도 용인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켈리와 손을 잡고 결재하러 들어가도 그 때 계셨던 상사 분들은 오히려 반갑게 맞이해 주셨었다. 심지어 문서를 수정하는 동안에는 "내가 켈리랑 있어 줄게" 라고 해 주실 정도였다. 켈리는 대사관의 마스코트였다.
2017년 사드 문제로 한중관계가 참 복잡했던 시기에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이 중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현안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그 시점에도 강경화 장관님은 대사관에 들러 애로사항을 듣겠다고 하셨다. 당시 나도 영사과 과장으로서 발언할 기회가 있었다. 우선 나는 행정직원들의 처우 개선이 필요하다고 했고, 또, 내가 서기관이기도 하지만 "켈리 엄마"이기도 한데 정말로 대사관 한 분 한 분이 내 딸을 키워주는 느낌이어서 정말 좋다고, 이런 문화가 다른 부서에도 확산되었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후에 당시 공사님께서 장관님을 공항으로 모시고 가는 길에 장관님께서 "켈리" 의 이름을 한 번 더 언급하시며 대사관의 따뜻한 분위기에 흡족해 하셨다고 한다.
물론, 이제는 정부 부처에서 마저도 "워라밸" 을 따지기 시작했지만, 사실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 돌아가고 있으면 모두가 하나의 마음으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렇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대사관 동료들이 내 딸을 잘 받아 주었던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나 한 사람의 운은 좋았을 지언정, 워킹맘의 육아에 대한 구조는 여전한 것 같다. 미얀마 근무 시절 여성 공무원들이 아이를 등에 업고 일하거나 아이들이 서로 함께 엄마 직장에서 놀고 있는 모습을 참 인상깊게 보았었는데. 단선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개도국인 미얀마에서조차도 워킹맘의 motherhood를 더 존중해 주는 것 같아서 부럽기도 했었다.
어차피 미래에는 우리 사회를 이끌어 나갈 아이들인데, 내 자식 네 자식 구분하지말고 한 사람을 소중하게 길러내는 문화가 정착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