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의 나는 육아 전의 나였다.
다정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
작년에 근무했던 직장 동료는 나를 보고 ‘천사’라고 했다.
화내는 걸 한 번도 본 적 없었다고.
“나였으면 벌써 뒤집어엎었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차분하게 말하세요?”
그 말에 쑥스러워 웃었지만, 그건 진심이었다.
밖에서의 나는 참고 또 참고, 고르고 골라 말하는 사람이었다.
상대가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도,
그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이해해보려 애썼다.
나는 천사였다.
말도 안 되는 사람들에게도 무한한 기회를 주고,
믿고 또 믿고, 참고 또 참는 그런 사람.
그러나 천사도 지친다.
퇴근 후, 집 주차장에 도착하면
그냥 눈을 감고 20분만 자고 싶었다.
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건 나였고, 그 다음은 첫째다.
첫째는 엄마가 없으면 눈이 떠지는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
아이 옆에 누워 조금 더 자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어쩌다 아이가 자고 있으면 캠이랑 연동된 핸드폰 앱을 켰다.
화장을 하면서도, 머리를 말리면서도 한쪽 눈은 거울을, 다른 한쪽 눈은 핸드폰 화면 속 자는 아이를 봤다.
아이가 일어나면 부랴부랴 눈썹 하나만 그린 채 아이를 마중했다.
바로 안아 엉덩이를 토닥이며 “사랑해”를 말하고,
엄마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 아이를 데리고 쉬야를 시켰다.
눈을 못 뜨는 아이를 대신해 닦아주고, 물을 내리고,
안아주고, 장난감을 찾아주고, 옆에 두고 출근 준비를 마쳤다.
그러다 둘째가 깨면 다시 반복.
출근해선 눈알이 빠지게 컴퓨터를 보고,
목이 아프도록 같은 말을 하고,
몇 시간씩 서 있다 보면
집에 돌아올 즈음 나는 녹초가 된다.
그나마 퇴근이 빠른 편인 나는
집에 도착하면 시계를 먼저 본다.
일어난 지 11시간.
나는 쉬고 싶지만, 나만 기다리는 아이들과 친정엄마를 외면할 수 없어
무거운 발걸음과 달리 방긋 웃는 얼굴을 하고 집으로 들어간다.
‘오늘은 절대 화내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아이들 이름을 부르고 현관문을 열면—
떼쓰는 둘째, 할아버지에게 거친 말을 내뱉는 첫째,
아직 씻지 않은 아이들,
널부러진 옷들.
하원 가방 정리,
양말 손빨래에 집착하는 친정엄마,
들리지도 않는 할아버지의 말씀들.
나는 들어오자마자 헐크로 변하기 직전이 된다.
옷만 갈아입고 아이들을 달래고 치우고
간신히 내 몸을 씻고 나면 바로 저녁 준비다.
아침도 점심도 못 챙겨주니
‘하루 한 끼는 내가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프라이팬 앞에 선다.
그러면 꼭 아이들이 울고 떼쓴다.
할미 할비는 아이들을 감당하지 못한다.
몇 번이나 말한 원칙도 늘 지켜지지 않는다.
다시 앞치마를 두른 채,
프라이팬에서 고기가 타는 냄새조차 맡지 못하고
나는 헐크가 되어 아이들에게 달려간다.
헐크의 분노에 아이들은 조용해지고,
나는 타버린 고기를 반찬 삼아 상에 올린다.
입으로는 계속 구시렁거린다.
이해? 배려?
그런 건 없다.
아이들에게도, 친정부모님께도
화내고 소리 지르는 딸이자 엄마만 남는다.
간신히 진정하고 아이들 밥을 먹인다.
눈꺼풀이 너무 무겁다.
일어난 지 12시간이 지났다.
몸이 피곤하니
아이들이 느리게 먹는 것도, 편식하는 것도
봐줄 여력이 없다.
작은 것도 그냥 넘기지 못한다.
남들에겐, 한없이 다정한 내가.
정작 내 식구에게는, 한없이 냉정하다.
날이면 날마다 섬세하게 챙기는 어린이집 선생님 선물,
바쁘실 텐데 연락 안 하셔도 된다는 배려심 깊은 최고의 학부모,
혼자 사는 직장 동료에게 집에 있는 수박을 챙겨서 줄까 생각하는 착한 동료.
그게 나다.
그런데 집에서는 그런 내가 사라진다.
나는 왜 이렇게 집에만 오면 감정의 끝으로 몰릴까?
천사 같은 나는 왜 집에 오면 날개를 찢어버리고 헐크가 되는 걸까?
오늘, 화내지 않았다고
그게 기쁜 일이 되어버린
그런 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