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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렇게 화를 낼까?

by 훈연

언젠가부터 나는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다.

아이가 숟가락을 떨어뜨렸다고 화를 내고, 널브러진 옷을 밟았다고 소리친다.
우유를 쏟았다고, 장난감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짜증 내는 아이에게

“징징거리지 마!”라며 또 화를 낸다.

그 나이대 아이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그런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나는, 오히려 가장 해서는 안 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어느 날, 순하디 순한 첫째가 둘째와 놀다 갑자기 악을 썼다.
“으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숨을 몰아쉬며,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오래도록 울부짖었다.

나는 아이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OO아, 왜 그래? 화내지 말고 말로 해야지.”

그 순간,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작 나는…

화가 날 때마다 말이 아니라 고함으로, 설명이 아니라 위협으로 반응했으니까.
아이의 맑은 눈동자가 조용히 묻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잘 알면서, 너는 왜 화를 내니?”

그날 밤, 남편과 긴급회의를 열었다.
“우리 순둥이가 왜 그랬을까?”
우리 아이가 우리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 걸까?
우리는 아이에게 이렇게 가르쳐온 건지도 모른다.


화가 나면 소리쳐라!

무섭게 소리쳐라!

헐크처럼 변해라!


나는 왜 이렇게 자주, 무섭게, 거침없이 화를 낼까?

화(火)- 몹시 못마땅하거나 언짢아서 나는 성(性)

사전은 이렇게 정의한다.
화는 불이다.
한 번 붙으면 꺼지지 않고 타오르다, 결국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후회와 상처라는 그을음을 남긴다.

나는 무엇이 그토록 못마땅하고 언짢은 걸까?

아이의 미숙함?
아직 소근육이 발달하지 않았고, 손과 눈의 협응이 어렵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하며, 노는 게 최고로 좋고, 하나에 집중하기 어려운 그 나이의 특성.
그런 당연하고 이해할 수 있는 모습들이 왜 나는 못 견디게 힘들까?


육아 전의 나는 ‘아이들은 변한다’를 믿었다.
그 변화는 대개 긍정적인 방향이었고, 언젠가는 바른 길로 나아가리라는 교육적 신념 같은 게 있었다.
그래서 나는 따뜻하고, 이해심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정작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아이들 앞에서는,
그런 내 모습이 사라졌다.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날까?

심리학적으로 말하는 '화'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1. 욕구불만
피로, 수면 부족, 배고픔 등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우리는 쉽게 짜증을 낸다.
맞다. 엄마는 사람이 아닌 ‘엄마’라는 존재가 되면서 배가 고파도 아이부터 챙기고, 졸려도 눕지 못하며, 만나고 싶은 친구도 마음껏 만날 수 없다.
그런데 아무도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말해준 적이 없다. 가르쳐주지도, 도와주지도 않았다.

나는 예방주사도 맞지 못한 채 어느 날 그 모든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했다.
단지,
“엄마는 원래 그런 거야.”
그 한마디에 기대어 나를 강제로 엄마로 만들고, 헌신을 당연하게 요구하는 사회.
그래서 나는 화가 난다.
그냥 쉬고 싶고, 먹고 싶은 걸 먹고 싶어서.

2. 상실감
어쩌면, 이것이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던 사람을 잃었다.

바로 ‘나’다.
엄마가 되는 순간, 나는 사라졌고, 나라는 존재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지 않으면 나의 존재조차 느껴지지 않는 날들이 반복되면서, 하루 종일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 하나 없이 살아가는 지금,
나는 점점 지워지고 있다.


나는 결국 깨닫는다.
내가 화를 내는 이유는 아이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기본적인 욕구를 드러내는 것조차 금지되는 ‘엄마’라는 프레임. 아이의 울음소리나 떼쓰는 행동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그 소리에 묻혀 점점 희미해지는 ‘나’의 목소리였다.

그렇게 하루하루, 나는 지워지고 있었고,
그 사실을 내 감정이 먼저 알아차렸는지도 모른다.

화는,
사라지는 나를 알리는 신호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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