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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가 Sep 02. 2024

엄마! 깻잎은 열 장만

1. 사랑은 상대가 싫다는 것을 안 하는 것부터 출발한다.

나는 이제 갓 60대에 들어선 따끈따끈한 젊은 할매다.


33년의 직장 생활을 끝냄과 동시에 도망치듯 도시를 떠나 귀촌을 했다.


세상에 운도 좋지! 큰 딸은 내가 명퇴를 한 바로 다음 달에 결혼했고, 미혼인 막내딸은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될만한 나름 안전한 지역에 거처를 마련해 독립을 시켰다.    


두 딸을 독립시키고 결혼생활 35년 차 부부가 단둘이 정원과 텃밭을 가꾸며 사는 귀촌 생활은 평화롭다 못해 가끔은 몸이 비틀릴 만큼 지루하다.    


대학 졸업장을 받기 직전부터 시작한 직장 생활은 이후 한 해도 쉬지 못하고 이어졌다. 내달리는 삶을 살아내느라 고단했던 내게도 평생 꿈꾸던 한가한 시간이 선물처럼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엉덩이에 달린 긴 꼬리가 아직 문밖에 남아 미처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했는데 방문을 '쾅' 하고 닫아버린 것처럼 도시에 남겨두고 온 딸들은 늘 눈에 밟힌다.


다행히 큰딸은 친정엄마보다 근처에 사는 시어머니와 죽이 더 잘 맞아 수시로 챙김을 당하고 있어 큰 걱정이 없다. 하지만 엄마 집밥을 유난히 좋아하는 막내가 혼자 밥은 잘 끓여 먹고 사는지 마음 한쪽이 늘 시리다.    


그런 나에게 딸은 항상 “잘 먹고살고 있으니 걱정 마슈!”라며 쿨내 쩌는 톡을 날린다. 그리고 가끔 안심하라는 의미로 자신이 만든 요리 사진을 카톡에 올린다. 어미는 그런 딸의 소행이 고맙고 한편으로는 여전히 안쓰럽다.     






그래서 귀촌 후 한동안 나는 막내가 엄빠 집에 왔다가 서울로 돌아갈 때면 무엇인가를 지지고 볶고, 다용도실과 냉장고 문을 여닫으며 딸의 손이 무겁도록 바리바리 싸서 보내고 싶어 안달을 냈다.     


그러나 손 큰 엄마에게 질린 딸은 어느 날부터 작정한 듯 가차 없이 독설을 날렸다.


"엄마! 다 필요 없고, 말린 표고버섯 딱 한 주먹만 줘! 깻잎은 열 장, 고추는 다섯 개, 무말랭이무침은 딱 한 번 먹을 만큼만, 저얼~대 많이 싸지 마! 냉장고에 들어갈 자리 없어서 많으면 다 버려. 저번에 엄마 김치 물러져서 다 버렸어. 김치는 싸지 마. 내가 사 먹을게"


굳이 내 김치에 그런 가혹한 평점을? 어미는 딸의 돌직구에 맞아 비틀거리면서도 '이게 다 서울 가서 사려면 돈'이라는 생각에 몰래 마른 버섯을 지퍼 백에 두세 주먹 더 넣는다. 깻잎도 슬쩍 20장 추가했다.


휴~! 다행이다.

귀차니스트 딸은 내용물 검수도 못 하고 부랴부랴 고속버스 시간에 맞춰 도망치듯 아빠의 차를 타고 고속버스 터미널로 출발한다. 일단 나의 범행은 성공적이다. ㅋㅋㅋ   


그러나 몇 시간 후 예상대로 딸에게 말 폭탄이 날아온다….


딸: 엄마 내가 깻잎 열 장만 넣으라 했지?

     표고버섯이랑 풋고추는 왜 또 이렇게 많아?

     대체 엄마는 왜 이렇게 내 말을 안 들어?


나: 미안 미안~!

    그거 사 먹으려면 다 돈이야. 냉동에 넣어 둬

 (어미의 사랑을 몰라주는 딸에게 야속함이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평화로운 관계를 위해 겉으로 굽신거린다.)


딸: 어엄~마!(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냉장고에 더 이상 들어갈 곳이 없다니까?

     썩어서 버리려면 음쓰 봉지에 넣어야 되는데 그거 다 돈이라고!


     (강조하면서) 여긴 버리는데도 돈. 이. 든. 다. 고. 요.

그리고 버릴 때 죄책감 들.


나: (순간 진심 뉘우치며) 아차! 그렇지.

     또 내가 내 생각만 했구나.     





이런 식의 다툼(일방적으로 내가 당하지만)이 수차례 반복되면서 나는 ‘내 사랑 방식이 딸에게 전혀 안 통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통감한다.    


내가 사랑을 담싸서 보낸 것들이 딸에게는 처치 곤란한, 반갑지 않은 선물이 될 수 있다.  마음을 아는 딸은 그걸 감사하고 즐겁게 받지 못해서 죄책감 느다.ㅠㅠ


나는 가슴이 아리고 쓰리지만 조금씩 내 사랑 방식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물론 오랜 지병이 그리 쉽게 나을 리가?


무엇인가를 자꾸 싸주고 싶은 병이 가끔씩 도진다. '이 정도는 딸이 봐주겠지?' 하며 몰래 몇 개씩 더 넣기를 시도하다가 까도녀 딸에게 적발되는 순간 여지없이 한 소리를 듣는다.   


결국 이 판에서 패배자는 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백기를 든다.      




나는 어느 날부터 딸이 먼저 싸 달라고 말을 꺼내지 않는 한 절~대 야채도, 김치도, 말린 먹거리도 싸지 않기에 이른다.


어쩌다 깻잎을 딱 다섯 장만 싸 달라고 하면 텃밭에 깻잎이 홍수를 이루어도 눈 딱 감고 칼같이 딱 다섯 장만 싼다. 딸이 원하는 것을 기꺼이 내주되, 딱 원하는 만큼만 준다.     


그리고 딸이 가져갈 반찬을 만드느라 기운을 빼는 대신 엄빠 집을 온 딸과 함께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노닥거리고, 거실에서 함께 tv를 보며 뒹군다. 울 집 강쥐 구름이는 하하 호호 작당한 모녀에게 목욕과 미용을 당한다.      


어라? 뭐지? 처음에는 사랑을 거부하는 딸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는데 이를 악물고 내 고집을 버렸더니 어느 순간 우리가 더 가까워졌다.


딸의 표정과 말투가 전보다 훠얼씬 부드럽고 다정하다. 그래 이게 바로 딸이 나에게 원했던 사랑이었다.


"딸아! 이제 됐냐?

편안하냐?

네가 좋다면 나도 좋다. "


그래!

 사랑은 상대가  싫다는 것을 안 하는 것부터 출발하지. 

 덕분에 내 삶도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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