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우리 삶을 관통하며 달려오는 기차라면, 삶은 기차가 도착하기 전에 무언가를 하는 자유의지의 시간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언지 알고, 원하는 것을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시간, 내 시간 속에서 온전히 나로 사는 시간.”
(정유정·지승호 지음,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은행나무, 2018, 25쪽)
정년을 몇 해 앞둔 어느 날, 은퇴하면 어떻게 살아야지 하는 상념이 불쑥 올라왔다. 내 지난 삶을 돌아봤다. 열심히 살았구나 싶었지만 허전하고 답답했다. 은퇴를 코앞에 둔 처지에 허전한 건 이해됐지만 답답한 건 좀 낯설었다. 따져봤다.
운이 따라줘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 삼십여 년을 성실하게 일한 건 맞았다. 무엇이 나를 성실하게 만든 걸까. ‘불안’과 ‘인정 욕구’였다.
취업 전에는 일터를 찾지 못할까 두려웠다. 직장에 들어가서는 일을 잘 해내지 못해 뒤처질까 염려했다. 점차 일에 익숙해지니 다행히 자신감이 붙었다. 자연스레 불안감은 줄고, 대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업무의 단순한 수행을 넘어 남들보다 잘하려 애썼다. 더 좋은 일터에서 일하고 싶어 욕심을 부리기도 했고, 분에 맞지 않는 명예도 탐해 봤다. 한데, 잘 해낸 건 분명한 것 같은데 정작 좋아하는 일이었는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감정에 휘둘려 열심히 살았을 뿐, 좋아하는 게 뭔지 몰랐고 하고 싶은 걸 외면한 채 살았던 거다. 허탈하면서 갑갑했던 이유다.
그때 다짐했다. 은퇴해서는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내 자유의지가 시키는 대로, 내가 원하는 걸 하며 나답게 살자고. 해서 내린 결정이 더 이상 명함을 만들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명함 없는 은퇴 생활’도 어느덧 5년 차. 비록 내 삶을 향해 달려오는 기차의 기적 소리가 들릴 법한 나이이지만, 지금 나는, 나만의 걸음걸이로, 좋아하고 원하는 뭔가를 하며 산다. 꼼지락꼼지락 사부작사부작. 욕심내지 않고 그저 자유롭게.
ⓒ 정승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