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쓸모와 쓰임이 있다. 그런데 쓸모는 각자 노력이지만 쓰임은 스스로 어쩌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탁현민 지음, 「사소한 추억의 힘」, 메디치미디어, 2023, 17쪽)
‘아무짝에 쓸모없는 놈’이란 욕설이 있다. 이 말 때문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각자 쓸모없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 입시에, 취업에, 출세에 매여 아등바등 산다. 마치 ‘쓸모 있는’ 사람으로 사는 게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쓸모가 뭐길래 우리는 이렇게까지 애쓸까. 어떤 일에든 쓰여야 살아갈 수 있을 테니 쓸모라도 갖고 있어야 해서다. 하지만 대개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쓸모와 쓰임 사이에는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틈’이 있어서다.
흔히 쓸모를 높이면 쓰임도 대체로 높아진다고들 말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대체로’라는 부사다. 둘 간에 내재한 관계의 부정확성을 교묘히 은폐하는 반면, 쓸모에 대해서는 과도한 믿음을 조장함으로써 현실에 끼치는 부작용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 스스로 노력해 제아무리 쓸모를 높여도 쓰이지 못하기 일쑤다. 반대로 누군가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쉽게 쓰여 당혹스럽게 한다. 기껏 쓸모를 높였더니 쓰임의 유효기간이 제멋대로여서 다시 새로 시작해야 하는 곤혹스러움도 안긴다. 쓸모와 쓰임 사이에는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무언가 – 그걸 운이라 해야 할지, 인연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부조리라 치부해야 할지 몰라도 - 가 작용하는 것이다. 해서, 그 둘 사이의 틈에는 그저 사는 삶이 아니라 살아내야만 하는, ‘분투’하는 삶이 있다.
사회 전체 차원에서 틈을 보다 줄일 방도가 있기는 하다. 개인이 쓰임에 실패해도 계속해서 기회를 줄 수 있는 사회를 만들면 된다. 투명하고 공정하며, 조화롭게 발전하는 사회를 만들면 된다. ‘코끼리 냉장고 넣기’와 같은 허탈하고 우픈 처방이다. 그럼에도 굳이 고집스레 말하는 건 우리 각자가 민주주의와 사회정의에 희망과 관심의 끈을 놓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여하튼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쓸모와 쓰임 사이에서 각자 고민하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우선 스스로 노력하여 내 쓸모부터 높여야 하고, 쓰일 만한 곳을 여기저기 수소문해야만 한다. 쓸모에 비해 버거운 곳에 있는 쓰임에 대해서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겸손도 때때로 챙겨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쓸모와 쓰임에 매몰되어 하나뿐인 내 소중한 삶을 뒤편에 놓지 않는 것일 테다. 어쩌면 둘 사이에서 벗어나 삶의 자리를 찾아보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감사하게도 나는 쓸모와 쓰임의 쳇바퀴에서 더 이상 분투하며 살지 않아도 된다. 은퇴한 덕이다. 내겐 즐겁고 주위엔 도움이 되는 쓸모가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 정도만으로 충분하다. 좋아하는 글쓰기는 늘리고 싶은 쓸모 중 하나지만 쓰임에 매달리지 않으니 자유롭고 편안하다.
ⓒ 정승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