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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꿍도 갱년기를

남편의 공황장애

by 램즈이어

새로운 꿈을 안고 나아가던 나의 오십 대 항해에 풍랑이 덮친 적이 있다. 남성 갱년기를 틈타 찾아온 남편의 공황 장애다. 그때까지는 음악이 흐르는 달콤한 섬나라를 지나왔던 셈이다. 야자수 아래 누워 첼로가 안 된다, 불어 단어가 외지지 않는다 하는 철없는 고민을 하면서.

우리 집에는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 내가 주인인 예술 지향의 나라는 문화적인 생활에다 만년 문학소녀의 이상을 좇는다. 짝꿍이 우두머리인 실용성의 나라는 부지런히 일을 하고 틈틈이 투자도 한다. 서로가 상대방의 나라를 조금 내려 보기는 하지만 갈등이 생기지 않게 조심하며 꾸려왔다.

남편이 병을 얻은 것은 어느 날 자신의 나라에 악재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집안의 비상자금과 연금 등이 거의 사라졌다며 좌절하고 우울감에 휩싸였다. 시(詩) 세계에 살고 있던 내게는 심정적 영향이 미미해서, 자산이라는 것은 숫자에 불과하다, 괜찮다고 아무리 다독여도 소용없었다. 두 사람 몸이 건강하니 계속 일하면서 회복하면 된다는 이성적인 설득도 먹히지 않았다. 맞벌이라 해도 남편 쪽은 아내에 비교할 수 없게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갖고 있나 보다. 아마도 그동안 일만 하고 달려온 번 아웃 상태도 한몫 했을 것이다.

본디 ‘걱정병’은 내 전공이었다. 갱년기 후로 무던한 성품이 옅어지고 시시콜콜 걱정하는 사람이 되었다. 자녀의 일에든 직장에서 마주치는 사건에든 모든 경우의 수를 헤아리며 가슴을 졸이는 날 보고 끌끌 혀를 차던 남편이었다. 우리가 염려하는 일의 구십 프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데이터가 있다며, 열심히 내 걱정 목록을 가지치기해 주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역할극이 바뀌었다. 이 사람은 한 술 더 떠 나와는 차원이 다르게 천근 같은 걱정 자루를 메고서 끙끙거리는 것이다. 그 내용도 세세하고 다양하게. 점점 그 무게를 버거워하더니 급기야 태산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반응했다. 아직 여러 소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부간에 대화를 많이 나눴어야 했는데…. 뭘 배운다고 밖으로 싸돌아다닌 것이 후회되었다. 심리학 수업에서 남성 중년의 위기에 대해 많이 배웠건만 왜 우리 집은 비켜 가리라 생각했을까? 중년의 남성은 이리 취약하니, 남편도 정서적으로 다정한 돌봄이 필요했는데.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자신(짝)이 겪는 자연적 쇠퇴에 대해 불평하지 않으며, 참나무만큼 강하지 않다고 해서 아쉬워하지 않는다는 말에 줄을 그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했건만. 막상 마주하는 배우자의 아픔은 놀랍고 생소했다. (이 정도의 일로 이렇게 무너질 줄은 본인도 나도 미처 몰랐다.)


“당신에게 좋은 남편이 못되네.”

“염려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아.”


짝꿍이 입술로 이런 마음을 표현할 때마다 긍정적인 말로 되받아 쳐야 했다.


“당신 충분히 좋은 남편이거든요?”

“건강하면 모든 것을 차차 만회할 수 있어요.”


부지런히 소망의 창검(槍劍)으로 반박했지만 짝꿍의 호소가 점점 절박해졌다.


“가슴이 답답해 죽겠어. 가슴이 아파. 숨도 안 쉬어져.”


초조함이 잔뜩 담긴 비장한 눈빛은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철렁했다. 불안은 전염성이 있다. 문화적인 양식을 주식으로 섭취하는 나는 괜찮다, 경제의 영향을 안 받는다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겉으로는 아픈 사람을 안심시키려 의연한 척했지만 점점 내게도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몇 년 전 갱년기 때 난리를 치고 남편을 힘들게 해서 이제 쌤쌤이 된 건가? 어찌 되었건 나만이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함께 휘청거리는 날이 많아서 할 수 없이 나 자신을 위해 신심(信心)이 좋은 후배에게 SOS를 쳤다. 한참 동안 그 품에서 위로받으며 언니처럼 의지했던 것 같다.

남편은 의사의 상담과 약물치료, 천사 같은 지인들의 기도로 1년이 지나며 차차 회복되었다. 마음이 올라서면서 걷기와 수영을 시작하고 더욱 열심히 하니 치유가 앞당겨졌다. 약을 끊을 무렵 주치의는 오십 대 중반에 이 병을 앓으면 재발이 잦다며 세 가지를 당부했다. 큰일 벌이지 말 것. 만성적으로 스트레스받을 일을 피할 것. 자연을 많이 접할 것.

그 말씀대로 일주일에 한 번 주중에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고향 공주에서 초록의 왕산에 둘러싸인 장애인 공동체를 방문하여 쉼과 봉사의 시간을 갖으며.

짝꿍은 아프고 나서 알록달록 색깔을 가진 총천연색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듯도 하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 모양새다. 감정 표현을 잘 안 하는 흑백 컬러의 사람이 감성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예전에는 식탁에서 묵묵히 식사만 하던 이가 참 맛있다, 왜 이렇게 맛있지? 하며 소란스러워지는 등.

오디세우스가 어느 날 무심히 닿은 섬에서 외눈박이 식인종 퀴클롭스를 만났듯 나도 그때 돌연 힘겨운 가장(家長)의 임무가 주어졌다. 노모(老母)와 학업 중인 아들과 아픈 남편을 돌보며 가계를 짊어지는 미션이. 도무지 홀로 감당할 수 없었는데 다행히 친족과 둘레 분들의 고마운 도움이 있었다. (인간은 역시 사회적인 동물이다.)

그 시기를 회고하면 일상이 순적하게 돌아가는 것에 대한 귀중함을 느낀다. 두근두근하는 마음 없이 매일이 지나가고, 식구들이 제자리에서 자기 몫을 감당하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세상을 보는 시각도 달라지고 아무나 어떤 상황이나 함부로 판단하지 않게 되었다.

또 마음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그 상황이 다시 주어진다면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 없지만 그때의 가장 큰 축복이라면 마음이 낮아진 것이다. 삶은 언제든지 낮은 곳으로 미끄러질 수 있는데, 그전까지 얼마나 마음이 높았던가? 높은 줄도 모르고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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