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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Mayfeng Nov 16. 2019

먹고 사는 일이 궁금한 사람






먹고 사는 일이 궁금한 사람




어딜 가든 먹고 사는 일이 제일 궁금한 나는 마트와 시장은 빼놓지 않고 들르는 시장 마니아다. 한국에서는 집순이이므로 인터넷 마트를 더 자주 이용하긴 하지만. 지난 기억들을 떠올려 보니 참 많은 시장들을 다녔다. 카이로Cairo(이집트)에서는 육류 시장을, 이스탄불Istanbul(터키)에서는 수산 시장을, 마이소르Mysore(인도)에서는 꽃시장을, 인레호수Lake Inle(버마)에서는 5일장을, 수마트라 섬에서는 팡구루란Pangururan(인도네시아)의 수요 시장을, 하노이Hanoi(베트남)에서는 향신료 시장과 롱비엔 새벽 시장을, 박하Bac Ha(베트남)에서는 일요일에 열리는 소수민족 시장을, 그리고 오슬로와 파리에서는 빈티지 시장을……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방문하는 도시마다 시장과 마트는 내 단골 코스였다. 물론 대부분은 식료품을 사러 갈 때였지만, 때로는 숙소 바로 앞에 마트가 있는데도, 버스를 타고 30분 이상 걸리는 먼 곳의 시장과 마트를 일부러 찾아갔다. 여행을 하면 집순이 모드는 사라지고 호기심 왕성한 모험가 모드가 된다. 오고 가는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풍경들과 사람들, 빛과 그늘들, 낯선 경험과 생경한 기분들…… 그런 것들을 사진으로, 글로, 기억으로 채집하는 일이 나의 즐거움이다. 그래서 고생을 사서 하나보다. 러시아에서는 유독 마트를 자주 들른 것 같은데, 대형 마트의 경우 한번 들어가면 보통 3시간 이상은 머물렀다. 물건이 많기도 했지만 처음 보는 것들도 많아서, 보고 또 보고, 그러다 궁금한 게 있으면 먹어보기도 하고, 여긴 왜 이렇게 빵값이 싸지? 향신료 종류는 왜 이리도 많으며 포장 박스는 또 왜 이렇게 예뻐? 한국에서 비싸게 주고 사 먹는 오트밀은 왜 20분의 1 가격이야? 이태리도 아닌데 파스타 종류는 왜 이렇게 많고 또 가격은 왜 이렇게 착해? 보드카 병들은 이렇게 아름다울 일이야? 이렇게 큰 포멜로Pomelo 도 1,700원 밖에 안 해? 유제품 종류는 이리도 넘치고, 치즈는 종류도 많아, 가격도 싸, 아 어쩜 좋아…… 이렇게 혼자 놀다보면 시간이 금방 가버렸다. 그러다 가끔 초콜릿이나 치즈 등을 득템해서 양 손 가득 봉지를 들고 나올 때도 있었다.














하루 종일 걷는 사람




이르쿠츠크에서 보내는 세번째 날에는 중앙 시장Tsentral'nyy Rynok을 찾아갔다. 사는 모습도 구경하고 꿀도 한 통 살 생각이었다. 러시아어로 시장을 리녹Рынок이라 하는데, 러시아에는 마트처럼 생긴 실내형 재래시장이 흔한 편이었다. 빨리 걸으면 10분 만에 닿을 거리였지만 숙소에서 나와 여기도 기웃 저기도 기웃, 그러다 보니 30분도 넘게 걸렸다. 이르쿠츠크 중앙 시장은 층고가 높은 현대식 단층 건물이었다. 창문이 많아 빛도 가득 들고 밝았다. 시장 안에는 육류와 생선, 유제품, 꿀, 식용 밀랍, 견과류, 말린 과일, 타이가 허브티, 수제 피클 등 자연 식품들이 넘쳤는데 특히 채소 과일 코너의 알록달록한 색조합은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몇 바퀴를 돌다가 유독 사람들이 몰리는 가게를 발견했다. 과자 가게였다. 러시아 사람들은 홍차와 함께 달달한 과자나 초콜릿을 즐기는데 그래서일까 남녀를 불문하고 과자 가게 앞에 서 있는 어른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가게는 작아도 과자의 종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얼굴이 보일 정도의 틈만 빼놓고는 온통 과자였다. 차곡차곡 쌓인 과자들과 그 위로 적힌 커다란 글씨들─과자의 가격과 이름─은 어떤 미술 작품처럼 느껴졌다. 거리에서도 과자로 가득한 매점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아마 이곳에 살거나 돌아갈 날이 머지 않았다면 나도 이것저것 샀을 것이다. 아직은 갈 길이 멀기 때문에 최대한 자제하며 말린 살구 500그람과 여행 내내 먹을 리뽀비 묘뜨Липовый мед(보리수꿀)만 200그람 사서 나왔다. 



밖에도 장이 열리고 있었다. 이런 혹독한 날씨에 야외에서 장사를 하다니, 물론 먹고 산다는 건 어디서나 다 힘든 일이지만 그곳 상인들이 존경스러웠다. 그 와중에 러시아는 베리 천국이었다. 스트로베리, 라즈베리, 크랜베리, 블랙베리, 블루베리, 카우베리, 커런트 등 세상의 모든 베리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이 각 가정마다 바레니Варе́нье─잼처럼 보이나 물처럼 묽은 것이 특징인 설탕과 베리류로 만든 보존 식품─를 만들어서 두고 두고 먹는 모양이다. 시베리아는 잣이 특산물이었는데 여러 판매대에서 잣이 든 솔방울을 파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솔방울과 잣을 통째로 담아 만든 바레니도 흔했다. 한 바퀴를 돌고, 두 바퀴를 돌고, 거의 세 바퀴를 돌았던 것 같다. 서리가 내려 앉은 홍시, 알이 유난히 검은 포도, 여기저기 멍이 든 석류, 얼은 듯한 체리, 오렌지색의 씨벅톤Sea Buckthorn(산자나무) 열매, 달고나를 닮은 식용 수지, 여러 종류의 잎차, 양털로 짠 보송보송한 양말과 담요, 색색의 털실, 각종 꽃씨와 채소 씨앗들…… 없는 게 없는 시장이었다. 옷이나 신발 등 중국제 공산품들도 많이 보였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영하 15도의 날씨에 자연 냉동된 생선들이었는데, 크기도 큰 생선들이 플라스틱 박스에 연필처럼 꽂힌 모습이 재미있었다.  



이제는 어디로 갈까? 계획이 없었으므로 그냥 발길 닿는대로 걸었다. 그러다가 다음 골목의 버스 정류장 부근에서 모피 코트를 입은 아주머니를 보았다. 그 앞에는 종이 박스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는데, 박스는 담요로 덮여 있었다. 뭐라 적혀 있긴 한데, 읽어도 무엇을 파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다가가서 물어보기에는 아주머니의 인상이 사납기도 하고, 모피 코트의 색상도 투톤으로 와일드한 느낌이어서 그냥 지나쳤다. 그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나중에 다시 그 길로 걸어 오는데 손님들이 박스 주변에 모여 있었다. 언뜻 보이는 박스 안의 정체는 강아지였다. 



계속 걷다가 이번에는 길 가운데 서서 인도의 여인들처럼 펌프로 물을 퍼 올리는 남자를 만났다. 이 추위에도 땅 속의 물은 얼지 않은 모양인지 계속해서 물을 퍼올렸다. 할머니 한 분이 플라스틱 통에 물을 받아 집과 집 사이의 오솔길을 따라 걸어 가셨다. 이르쿠츠크의 옛집들은 너무 예뻐서 안에는 사람이 아닌 인형이 살고 있을 것 같았다. 나무를 오려 레이스를 만든 것 같은 처마, 아이가 그려놓은 듯한 삐뚤삐뚤한 창문, 파스텔 톤의 외관…… 이런 미적 감각은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지 궁금했다. 








콧물도 흐르고 배도 고팠다. 말린 살구를 꺼내 입에 넣고 허기를 살짝 달랬다. 중간 중간 길에서 보이는 포즈 파는 식당에 들어갈까 했지만 실내 분위기를 보니 썩 내키진 않았다. 그래서 또 계속해서 걸었다. 대충 알아둔 식당 하나가 있었는데 마침 눈 앞에 간판이 보였다. 와인색 바탕 위에 ‘카페 고려’라는 글자가 하얀색의 고딕체로 쓰여져 있었다. ‘카’와 ‘페’는 가늘게, ‘고’와 ‘려’는 그것보다 1.5배 정도 굵게 적혔으나, 자음과 모음 사이의 간격과 글자의 균형이 전혀 맞지 않아 어설픈 느낌이 났다. 분홍색 한복을 입은 여인의 전신 사진이 식당 창문에 붙어 있었다. 식사 시간을 이미 지나 식당 안은 널널했는데 메뉴판을 펼치자 색색깔 매직으로 쓴 손글씨가 인상적이었다. 강추라고 적힌 5번 메뉴 ‘고려인 전통 국수'를 시켰다. 250루블(약 5천원)이었다. 뜨끈한 국물을 상상했는데 냉면처럼 차가운 국수가 나왔다. 영하의 날씨에 이렇게 차가운 국수라니. 국물을 떠서 맛을 보니 맵지 않은 고춧가루 맛과 간장 맛이 났다. 이 새콤달콤함, 뭐라 할까? 오이무침 맛이었다. 고명으로는 고기 볶은 것과 달걀 지단, 오이, 당근, 고추 등이 올라가 있었다. 종지에 고춧가루가 따로 담겨 나왔지만, 이미 붉디 붉은 국물에 더 이상의 고춧가루는 더하고 싶지 않았다. 익숙한 맛이라 후루루룩 잘 넘어갔다. 색색의 시스루 커튼과 노래방 조명, 꽃그림 액자들, 정체를 알 수 없는 촌스러운 분위기 속에 신나는 음악은 계속 흘러 나왔다. 식당 안에는 세 명의 러시아 아주머니들이 맥주를 마시며 식사 중이었는데, 취기가 조금 오른 모양인지 한 여인이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서빙을 하는 주인 아주머니도 흥이 나는지 접시를 들고서 엉덩이를 씰룩거렸다. 그리고 곧 나머지 아주머니들도 일어나 춤을 추었다. 나는 국수를 먹다가 그들의 손에 이끌려 정체 불명의 춤을 함께 춰야만 했다. 



“유즈나야 까리에? Южная корея”



하얀 스웨터를 입은 귀여운 아주머니가 두번에 걸쳐 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같이 셀피만 찍었다. 나중에 친구에게 물어보니 남한에서 왔냐는 말이었다. ‘야 까레얀까. Я кореянка.(한국인이에요.)’만 외우고 다니다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는 순간이었다. 미리 알았다면 자신있게 ‘다. Да. (네)’하고 말했을텐데. 나중에 횡단열차 안에서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홍차 티백 두 개에 리뽀비 꿀과 우유를 넣고 밀크티를 만들었다. 몸이 녹는 기분이 좋았다. 그제서야 카메라를 벗고 양쪽 어깨에 파스를 붙였다. 아, 그 날 석양이 무척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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