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lie Mayfeng Nov 16. 2019

몽롱한 날의 이야기들





몽롱한 날의 이야기들




새 도시에서 맞이하는 첫번째 아침은 늘 설렌다. 그녀는 출근을 했고, 나는 그녀로부터 문 잠그는 법을 배우고 다시 눈을 붙였다. 바쁠 일도 없고 푹 자도 되는데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았다. 한국에서 챙겨간 인스턴트 팥죽 하나를 아침으로 먹고 밖으로 나갔다. 




이르쿠츠크의 아침 



복도의 우편함 위에는 두 종류의 화초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하늘은 파랗고, 공기는 바삭거린다. 햇살은 몽롱하다. 나무의 그림자는 길고, 눈길 위에는 패인 발자국마다 그림자가 고인다. 막 시동을 거는 차들에서는 구름 같은 연기가 솟아 오른다. 붉은 빛 샤프카에 검은 털코트를 입은 엄마는 털부츠에 털목도리를 두른 귀여운 딸의 손을 꼭 붙들고 걸어간다. 한 소녀가 꽃무늬 쟈켓에 연보라색 곰돌이 모자를 쓰고 한 손에는 오렌지색 플라스틱 삽을 들고서 굴렁쇠를 굴리는 모양으로 맨 땅을 쓸며 걷는다. 아에로포트Аэропорт(공항)라 적힌 480번 버스가 지나간다. 횡단보도가 아닌 곳에서 길을 건너려고 하던 나이든 여인이 한산해진 도로 위를 은빛 지팡이를 짚고 느리게 느리게 좌우를 살피며 걸어간다. 



나는 소베츠카야 거리Sovetskaya ulitsa에 있는 스베르뱅크로 들어가 며칠 쓸 돈을 뽑았다. ATM에서는 최대 5,000루블까지 뽑을 수 있었다. 두 번에 걸쳐 총 10,000루블(약 17만원)을 뽑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짐을 챙기고 택시를 불렀다. 예약해 둔 호스텔로 가고 있는데 카톡으로 메시지가 들어온다.



“전화 안 받네. 어디야 딸?”


“엄마, 나 러시아야. 어제 왔어.”



곧 페이스톡으로 전화가 걸려온다. 친척 동생이 오랜만에 놀러 왔는데 언니가 보고 싶다며 전화를 걸어주라 한 것이다. 호스텔로 가는 동안 이르쿠츠크의 풍경을 보여주며 엄마와 친척 동생과 짧은 통화를 나눴다. 



숙소는 칼 마르크스 대로Ulitsa Karla Marksa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수크헤 바토라Sukhe-Batora라는 거리에 있었다. 짐을 끌고 주차장 같은 공터로 들어가자 왼쪽 편에 알마즈Алмаз라는 쥬얼리 상점, 바로 그 옆에 영어로 ‘Rolling Stones’라 적힌 하얀색 둥근 간판이 보였다. 숙소는 2층에 있어서 또 다시 계단으로 짐을 옮겨야 했다. 120년 된 건물이라는데 레노베이션을 멋지게 해서 깨끗하고 코지Cozy한 분위기였다. 호스텔 안에는 전자 기타와 앰프가 놓여 있었다. 호스텔 이름도 그렇고, 분명 이곳 주인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크인을 하자마자 거주등록을 요청했는데, 체크아웃 할 때 발급해 준다고 했다. 짐을 내려두고 바로 근처에 있는 슬라타Слата라는 마트에 갔다. 바나나 6개, 바게트 1개, 3.2% 우유 한 팩, 400그람 짜리 오트밀 한 박스, 물만 부으면 되는 도시락에서 나온 인스턴트 매쉬드 포테이토, 이렇게 아침으로 먹을 것들을 간단히 샀다. 




이르쿠츠크의 밤



제냐와 나는 저녁을 함께 하기로 하고, 바브르Бабр─시베리아 호랑이─동상 앞에서 저녁 6시에 만나기로 했다. 나는 조금 일찍 도착해서 그녀를 기다렸다. 영하 19도의 날씨에 밖에서 30분을 서 있었더니 발가락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제서야 시베리아의 추위는 이런 거구나 싶었다. 사실 약속 장소로 걸어오면서도 너무 추워서 공연장으로 보이는 곳에서 살짝 몸을 녹였었다. 이렇게 더 서 있다가는 말 그대로 얼어 죽을 것 같아서 마지막 5분간은 130지구 초입에 있는 하랏츠 바Harat’s Bar에 들어가 기다렸다. 그런 날씨에도 맨손으로 기타를 튕기며 노래하는 예술가를 보았다. 



우리는 바브르 얼굴 방향으로 보이는 포즈나야 38 Позная 38로 들어갔다. 체인점이었는데 러시아 전통 음식을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종류별 포즈позы─부랴트족의 음식으로 중국에서는 바오즈, 몽골에서는 부즈라 부르는 일종의 만두─와 샐러드, 수프, 디저트, 음료 등 메뉴판에 적힌 메뉴만 해도 우리의 김밥천국 수준으로 많았다. 우리는 따로 밑반찬을 시키는 문화가 아니지만 여기는 설탕 하나 조차도 모두 주문을 해야했다. 그녀는 포즈 세 개에 러시아식 팬케이크인 블린 한 접시, 곁들여 먹을 연유, 짧은 누들이 들어있는 치킨 수프, 빵 한 조각, 홍차, 우유를 주문했고, 나는 얼만큼 먹게 될지 몰라서 우선 포즈 하나에 블린 한 접시, 그리고 곁들여 먹을 소스로는 스메타나Сметана─러시아인들이 즐겨 먹는 사워 크림의 일종─를 고르고, 그릭샐러드와 레몬 조각을 넣은 홍차를 주문했다. 종업원은 주문 받은 즉시 휴대용 카드 단말기로 계산을 했다. 음식은 빠르게 차려졌다. 블린은 한 접시에 세 장이 담겨져 나왔다. 그녀는 포즈를 먹는 방법이 따로 있다며 시범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우선 손을 씻고 오더니, 왕만두를 한 손으로 잡고 옆구리를 살짝 베어물었다. 그리고는 그 안의 육즙을 아주 순식간에 ‘후릅’하고 청소기처럼 빨아 들였다. 부랴트식 만두는 쉽게 말해 두꺼운 만두피 안에 떡갈비가 통째로 들어간 모양으로 고기맛이 강한 편이었다. 할머니의 음식처럼 조금 투박해 보여도 정감 있는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소화도 시킬 겸 130지구를 걸었다. 130지구에는 시베리아 전통의 목조 가옥들을 재현해서 만든 레스토랑이나 카페 등의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놀이동산이나 영화 셋트장에 온 것 같았다. 



계속 걷다가 길 끝에 위치한 모드느이 크바르탈Модный Квартал 이라는 쇼핑몰로 들어갔다. 모드느이는 ‘유행’, 크바르탈은 ‘쿼터Quarter(구역)’라는 뜻으로, 4층 규모의 작고 현대적인 쇼핑몰이었다. 1층 중앙에는 아직 치우지 않은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와 은빛 드레스를 입은 마네퀸 여인이 얼음 호수 모형 위에 앉아 있었다. 크리스마스─러시아의 크리스마스는 1월 7일─로부터 딱 9일이 지났으니 아마 한 달 정도는 더 내버려두지 않을까 싶었다. 사야할 건 전혀 없었지만 들어왔으니 꼭대기 층까지 올라가 보기로 했다. 카페, 찻집, 패스트푸드점, 영화관 등 작지만 필요한 건 다 있어 보였다. 우리의 쇼핑몰과 마찬가지로 꼭대기 층에는 극장─키노 크바르탈Кино Квартал─이 있었는데, 영화비는 약 5천원 정도였다. 유독 버거킹 매장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는데 작년에 문을 연 이르쿠츠크 최초의 버거킹이었다. 그녀는 이곳이 탄산음료 리필이 무료라며 귓속말을 하듯 전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오래 전 기억이 떠올랐다. 2002년 처음으로 떠난 해외 여행에서 ‘무료 리필 안 되요!’라는 말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맥도날드였는지 KFC였는지는 잘 기억나진 않지만, 중국 장쑤성 난징 옆에 있는 양저우라는 도시였다. 나는 처음으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다른 곳에서는 전혀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보다 더 큰 충격은 화장실을 돈 주고 가야하는 나라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을 때다. 개인적으로는 문이 없는 화장실보다 그게 더 충격이었는데, 프랑스 파리 시청사 부근의 맥도날드와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의 버스 디포 화장실에는 돈을 내야만 들어갈 수 있는 회전 펜스가 쳐져 있었다. 그 외에도 잔잔한 문화 충격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인도네시아에서 파당 음식점에 갔을 때가 떠오른다. 파당 음식은 고춧가루를 써서 매콤한 것이 특징인데 우리 입맛에도 맞아서 여행 중에 자주 찾곤 했었다. 그 처음은 이랬다. 수마트라 섬의 부킷팅기Bukittinggi라는 곳의 식당이었다. 주문을 따로 하는 곳이 아니어서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테이블 위로 음식들이 가득 차려졌다. 흰 쌀밥에 생선조림, 닭튀김, 야채볶음, 생 야채, 삼발소스 등 갖가지 요리들이 나왔다. 마치 한정식 식당에 온 것 같았다. 어떻게 다 먹나 싶을 정도로 종류가 많아서,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맛있어 보이는 것 위주로 골라 먹었다. 식사가 끝나고 종업원이 오더니 손 안 댄 음식들을 모두 다시 들고 갔다. 희귀한 광경에 가만히 더 보고 있었는데, 종업원은 그 음식들을 다시 손님에게 내려고 가져가는 게 아닌가! 우리나라로 치면 음식을 재탕하는 일이었다. 파당 음식점은 먹고 싶은 음식들을 골라 먹는 방식으로 손대지 않은 음식은 전혀 계산하지 않는다. 독특한 식사법은 그렇다 쳐도, 나왔던 음식을 다시 손님상에 올리는 것은 위생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제냐와 나는 쇼핑몰에서 나와 다시 길을 걸었다. 당장 헤어지기도 아쉽고 춥기도 해서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두 군데의 카페를 들어갔으나 곧 마감 시간이라고 하여 그냥 나왔다. 계속 걷다가 문 열린 카페로 들어갔다. 레닌가Ulitsa Lenina 9번지에 있는 레닌스트릿커피Lenin Street Coffee라는 곳이었는데 카푸치노 한 잔 가격이 79루블(약 1,500원)이었다. 하트 모양의 라떼아트도 그려져 나왔다. 30분간 더 얘기를 나누고 제냐와는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8시 57분, 칼 마르스크 거리를 걸어 숙소로 돌아가는데 어디선가 음악이 흘러나왔다. 출처는 알 수 없었지만, 재즈였고, 텅 빈 거리의 코너에는 시네마 클럽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차 두 대가 휭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이전 06화 부랴트족 제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