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그 조그만 것의 위엄이란
엄마는 아빠가 은퇴하면 안방에 둘 TV를 새로 사겠다고 몇 번이고 선언했다. 아빠가 트는 온갖 TV 프로그램과 취향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장 살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는 것은 가족의 화합을 위해서라고, TV가 하나여야 가족들이 옹기종기 TV 앞으로 모여든다고 말했다.
TV는 늘 아빠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보여주었다. 엄마가 리모컨은 아빠의 것이라 선언한 덕이었다. 이쯤 되면 리모컨을 가진 아빠의 위엄이 높은지 리모컨을 보호해준 엄마의 위엄이 높은지 알 수 없었지만 여하간 리모컨을 통해 집 안 서열은 아빠, 엄마 그 뒤에 언니와 나로 정리되었다.
맛있는 음식도 좋은 물건도 다 양보해주는 아빠였기에 리모컨만은 모두가 지켜주었다. 우리는 자주 다 같이 TV를 봤다. 야구, 중국 드라마, 자연인 이야기, 북한 사람 이야기, 배구, 축구, 마라톤... TV 전권을 휘두르는 생활에 익숙해진 아빠는 명절에 온 친척이 모여들어도 리모컨을 놓지 못했다. 하지만 모두가 우리 가족처럼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유럽 자전거 경주(그렇다, 우리 집은 해설도 알아들을 수 없는 유로뭐시기 채널의 뚜르두자전거(?)도 본다)가 지겨워진 큰엄마는 리모컨을 가져가 아침드라마를 틀었다. 장미씨와 제 사이를 갈라놓지 마세요! 모두가 아침드라마를 종류별로 보게 된 순간 친척 전체의 서열 중 으뜸은 단연 큰엄마임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런 큰엄마의 위엄은 큰아빠가 지켜주었다.
어느 날부터 아빠가 고르는 채널은 엄마가 좋아하는 채널과 비슷해졌다. 드라마를 왜 보냐는 입장에서 가장 먼저 눈물을 흘리는 입장이 된 아빠는 이제 온갖 트로트 프로그램이나 시골 생활 이야기를 본다. 여섯 시 내 고향은 누가 보나 했더니 내 부모님이 보더라고. 나도 어느새 원하는 채널을 틀어주지 않는 아빠에 대한 야속함이 아빠가 어떤 채널을 보는지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는 나이가 되었다. 아빠는 노래를 좋아하고 산을 좋아한다. 리모컨이 뭐길래 나를 섭섭하게도 했다가 기특하게도 만드는가. 출가할 때가 되면 아빠를 위해 TV를 대문짝만 한 것으로 새로 사드릴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