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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머리오리 Jan 28. 2021

£ 1-1. 인간에게 집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집, 가족, 그리고 어느 한 남자의 사는 법

통상 우리는 주거를 목적으로 하는 공간을 집이라고 합니다. 실정법상 용어로는 ‘건축물로서 주택 용도의 주거공간’입니다. 따라서 주거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공공건축물이나 업무용, 공장용 건축물 등은 여기에서 말하는 집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살기 위해 지어진 주거공간으로서의 집은 당연히 그 속에서 사람이 안락하게 살기 위한 효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즉,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하며, 눈비나 바람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기본입니다. 물론 현대에 지어지는 집들이 비바람이나 눈비가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하며, 쾌적하고 아늑함을 갖춘 집은 그리 흔치 않습니다. 이에 더해 전망 좋고, 계절의 정취도 느낄 수 있는 그런 집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조금 더 욕심을 내 가족 구성원의 수나 가족의 취향, 경제적 부담 능력까지 고려한 집을 찾는다면, 그 일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만의 집’을 직접 지어보고자 소망합니다. 비록 현실적인 이런저런 문제로 선뜻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지만, 그 소망의 크기는 작지 않다고 보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집을 지으려는 것일까요. 대체로 ‘전원풍경이 있는 마을이나 숲이 있는 한적한 곳, 또는 바다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소박한, 아담한, 또는 멋진 집을 짓겠다.’라고 답합니다. 그러나 ‘그런 집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라는 구체적인 질문에 부딪히면 대부분 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집에 대한 나름의 견해와 계산된 전략이 없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필자는 집이란 ‘멋진 집’이 아니라 ‘살기 좋은 집’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집은 아주 드뭅니다. 내 집 마련의 가장 손쉬운 방법은 기존의 주택을 매입하는 것인데, 매매로 취득한 집이 ‘살기 좋은 집’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집이 앞으로 살 사람이 아니라 과거에 살던 사람들을 위해 고민하며 지어졌던 집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현재 거래되고 있는 전원주택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집주인이 직접 살기 위해 지은 집이 아니라 일명 집장사라고 하는 건축업자가 지은 집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집장사가 지은 집을 ‘살기 좋은 집’이라고 보기엔 좀 어려움이 있습니다. 매매의 수월성을 위해 외관에 치중했음은 물론이고, 경제적 이윤을 목적으로 지어진 집들이기에 ‘살기 좋은 집’으로서 온전히 기능하기는 어렵습니다.


19세기 영국의 미술공예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을 이끌었던 윌리엄 모리스는 친구인 필립 웹에게 자신의 신혼집을 짓게 했습니다. 바로 레드 하우스(Red House)지요. 이 집에는 모리스의 건축적 이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집에는 쓸모 있다고 알려졌거나 아름답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면 있어서는 안 된다."라는 전제가 충실히 지켜졌다고 합니다. 방은 총 9개가 있고, 외부에는 허브정원과 야채정원, 꽃밭, 유실수로 꾸며져 있는데, 이들 정원 역시 외부에 있는 방이라는 개념으로 설계하였다고 합니다. 모리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술이 창출한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름다운 집이라고 답하리라. 그다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름다운 책이라 말하리라”


레드 하우스(Red House)는 마크 어빙이 그의 저서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 에 소개할 만큼 빼어난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니, 필자의 ‘살기 좋은 집’과 함께 언급한다는 것은 분수에 넘치고 외람된 일입니다. 다만, 모리스가 가진 건축적 이상에 공감되는 부분이 있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즉, 집이란 멋지게 보이는 치장보다는 쓸모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0세기 전반기 건축의 혁신을 가져온 미국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주택에서 중요한 것은 방이지 건물 정면의 외관이 아니다’라는 견해 또한 이와 맥이 닿아 있다고 보입니다. ‘정원 역시 외부에 있는 방이라는 개념’ 또한 꼭 마음에 담기는 부분입니다. 마당은 시각적으로 거실의 연장이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입니다.  ‘살기 좋은 집’이 곧 이것입니다.


‘살기 좋은 집’이란 ‘주인을 닮은 집’입니다. 그 말은 곧 집주인을 비롯한 가족 구성원의 품성과 취향이 묻어나는 집을 뜻하는 말이라 여겨집니다. 그런 집은 바로 ‘자신만의 집’과도 맥이 통하는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면 그런 ‘주인을 닮은 집’, ‘자신만의 집’, ‘살기 좋은 집’은 어떻게 지을 수 있을까요. 여러 고민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만약 위와 같은 입장에 동의한다면, 이런 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족 구성원의 생활 동선에 맞는 적합한 위치를 선택한다.’

‘가족 구성원의 수에 맞는 건축물 규모를 정한다.’

‘가족 구성원 각각의 요구와 취향을 종합한 결과를 토대로 구조를 결정한다.’  

  

원론적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것에 직면하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런 질문이 되면 사실은 좀 어려운 문제가 됩니다. 집의 위치 선정에 따른 각종 고려사항이나 건축물의 규모, 방향 및 구조 등 꽤 복잡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앞으로 이런 문제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선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몇 가지 있습니다. 다음에 열거하는 문제들이 선결되지 않으면 ‘자신만의 집’을 짓고자 하는 문제는 뒤로 미루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일 먼저 다가오는 첫째 문제는 물론, 건축비용의 문제일 것입니다. 세상일이 다 그렇듯, 아무리 하고 싶어도, 아무리 온당한 일일지라도, 돈이 없으면 그것은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만의 집’을 꿈꾸지만, 이 문제에 부딪혀 어쩔 수 없이 꿈을 접고 맙니다. 그럼 어떤 방식으로 건축비용을 마련하느냐의 문제인데,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의 여윳돈은 있어야 엄두를 낼 일이니,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최소한 부지 매입비 정도의 자금은 확보되어야 할 것입니다. 일단 부지가 마련되면, 아파트를 처분하는 수준에서 어느 정도는 해결이 되리라 보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가족 구성원의 생활 동선이 길어지는 것입니다. 도심을 벗어날수록 토지의 매입비용은 저렴해지겠지만, 원거리 출퇴근이나 등하교, 쇼핑 등에 따른 불편함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에 더해 아파트 인근에 즐비한 음식점에서 손쉽게 시켜 먹던 배달 음식들, 치킨집, 생맥줏집, 세탁소 등도 대부분 포기해야 합니다. 편리함은 쉽게 익숙해지지만, 불편함은 상당히 오래 가는 법입니다. 그러나 세상 이치가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을 것이니, 기회비용의 차원에서 스스로 가늠해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아파트 생활의 편리함을 접어두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꿈꾼다면, 이런 정도의 불편함은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자녀의 교육 문제일 것입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정도의 자녀라면 조금 일찍 서둘러 버스를 태워 보내거나 부모가 자가용으로 등하교를 시켜줄 수도 있겠지만, 아직 어린 자녀를 두고 있다면 인근 학교로 전학을 시켜야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물론 요즘은 시골 지역의 학교가 교육 당국의 지원을 더 많이 받아 교육여건이 나쁘지 않으며, 특성화 학교로 지정되어 특별한 지원을 받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학원 교습이나 학습지 지도 등 도시지역의 교육 분위기에 젖은 상태에서 이를 포기하기란 그리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순전히 부모의 교육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네 번째는, 전원생활을 하는 것에 대한 가족 구성원의 확고한 동의와 환경에 대한 적응력입니다. 가장 중요한 요인이 아닐까 합니다. 가족 구성원 중 어느 하나라도 동의하지 않거나 전원생활에 적응할 수 없는 사유가 있다면,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전원풍경이 아무리 멋지고 동경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 생활 근거로서의 전원주택에서 산다는 것과 가끔 찾아가서 쉬고 오는 별장이나 친지의 전원주택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다섯 번째는, 가족 구성원의 취향이나 집에 대한 이해, 사회관계망 등에 대한 것입니다. 여성분들은 대체로 전원생활보다는 아파트 생활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전원생활이라는 것이 아파트 생활보다는 가사노동의 양이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동안 형성된 이웃과의 관계 또한 중요할 것입니다. 가뜩이나 가사노동의 부담이 큰 주부로서 아파트 생활의 편익을 쉽사리 놓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남성분들 중에도 전원생활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집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집이란 단지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잠을 자고 쉬는 곳이다, 라는 이해가 그것입니다. 이처럼 집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경우라면 아파트가 가장 적합한 휴식공간이 될 것입니다.

    

【그림 1-1-1】집이란 가족의 삶의 이야기를 담을 때 의미 있는 공간이 될 것입니다.


전원주택은 어떤 구조로 만들어지든 아파트와는 달리 손이 많이 가게 마련입니다. 잔디도 깎아야 하고, 정원수도 돌봐야 하고, 텃밭에 심어놓은 푸성귀도 돌보아야 합니다. 그만큼 전원주택의 유지·관리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만약, 골프나 테니스, 등산, 친목모임 등으로 사회관계망을 넓게 형성하고 있고, 그곳에 의미를 크게 두고 있는 분이라면 집안일에 그만한 시간을 투자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관리가 안 된 전원주택만큼 스산한 풍경도 없을 테지요. 그 빈자리는 고스란히 아내의 몫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여섯 번째는, 가족 구성원의 학습되지 않은 환경에의 적응력의 문제입니다. 필자의 지인은 오래도록 노력한 끝에 아내와 아이들의 동의를 얻었지만, 집 지을 땅을 보러 다니던 중 아내와 자녀가 풀벌레를 보고 질겁하는 바람에 결국 오랫동안 꿈꾸었던 소망을 접어야 했다고 합니다. 전원주택단지이든,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든, 산림에 인접한 지역의 특성상 풀벌레는 물론 개구리, 두꺼비, 심지어는 뱀까지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전원주택의 수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이런저런 선결되어야 할 문제들도 있는 것입니다.

 


필자는 다소 즉흥적으로 집짓기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오래전부터 막연한 생각으로 취미 삼아 건축 관련 책을 사보거나, 고건축 답사를 다니거나, 집에 대한 나름의 꿈을 담아 기초그림을 그려보기도 했지만, 내 집을 짓는 일은 먼 훗날에나 생각해볼 일이었습니다. 당장 경제적인 부담도 문제지만, 아이들의 학업 문제 또한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가족 모두가 귀촌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참에 마침 시 외곽에 집을 짓기에 적당한 땅이 매물로 나와 저축해둔 여윳돈으로 매입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땅은 둘째인 딸아이를 위해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초등학생인 딸아이는 심한 자폐성 장애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이후 고등학교까지 학업을 마친다고 해도 자립적인 생활이 어렵다고 생각되었습니다. 훗날 큰아이가 결혼 후 독립을 할 때가 되면, 딸아이와 함께 살아갈 집을 지어서 귀촌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미리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딸아이에게 예쁜 꽃밭과 마당이 있는 집을 지어주고 싶었습니다. 딸아이는 아주 어려서부터 안방에 놓인 침대만을 자신의 유일한 공간으로 했습니다. 그 외에는 어디라도 불안하기만 한 곳이었지요. 마당이 있어 조금 걸을 수 있다면, 꽃밭을 가꿀 수 있다면, 좀 더 멀리 볼 수 있다면, 햇빛과 바람을 느낄 수 있다면, 딸아이도 언젠가는 좀 더 넓은 세상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로 계획이 앞당겨졌습니다. 필자가 그만 그 땅에 빠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컨테이너를 하나 마련해 두고는 근무가 없는 날에는 온종일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풀포기 하나, 심어놓은 작물 하나하나에도 마음이 쏠렸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땐, 온전히 혼자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쳤던가 봅니다. 처음 얼마간은 필자가 거두어 온 오이며 호박 등을 받으며 반색을 하던 아내가 드디어 볼멘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맞벌이 가정에서 어느 한쪽이 가사 일에서 온전히 손을 놓아버리면, 그 일은 고스란히 다른 한쪽이 도맡을 수밖에 없습니다. 필자 부부처럼 장애아를 키우는 상황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테지요. 아니, 일의 분량보다는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였을 것입니다. 급기야는 아내가 날을 세우며 ‘이럴 바엔 차라리 그곳에 집을 짓자’라는 말을 꺼냈습니다.

   

【그림 1-1-2】 살다 보면 때로는 이런 곳에서 위안을 받기도 할 테지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당장 아이들의 학업이나 건축비용은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논의 끝에 차선책으로, 우선은 조그맣게 지어놓고 쉬는 날이면 가족 모두가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하자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두 집 살림살이를 꾸려야 합니다. 자칫 더 큰 문제가 되기 쉬운 일이었습니다. 답을 못 찾고 있던 어느 날, 아내가 아쉬운 듯 말끝을 흐리며 한마디 했습니다.    


‘큰아이, 지금이 아니면 그 아이 인생 어느 때에 전원주택에서 살아볼 날이 있을까?’  

  

무엇인가 한차례 머리를 후려치는 듯했습니다.  

  

‘아. 그렇지! 우리랑 한집에서 같이 살 수 있는 날도 그리 많이 남지는 않았네!’   

 

먼 훗날의 일처럼 여겨왔었습니다. 아직 어린아이라고만 여겼습니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한다면,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모든 삶이 딸아이에게 맞추어져 왔다는 말이 옳을 것입니다. 큰아이는 언제부턴가 뒤로 밀려나 있었던 것입니다. 아내의 말을 듣는 순간 불현듯, 큰아이와 한집에서 부대끼면 살날이 2년 남짓밖에는 남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2년 후면 졸업, 지방 도시에 사는 처지이니 대학에 진학하면 기숙사에 들어갈 테고, 그리고 군입대, 복학, 취업, 결혼으로 이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입시 준비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염려했던 마음은 멀찌감치 물러섰습니다. 조금 멀어진 등굣길 정도는 그리 문제가 되지는 않을 듯했습니다.

   

‘갑작스러운 환경변화로 다소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등하교에 다소 불편을 겪더라도, 부모와 함께 살았던 시간이 그 아이의 인생에 더 가치가 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살고 있던 아파트를 처분하고, 약간의 대출을 내고, 마침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는 작은 아이는 인근에 있는 작은 중학교로 진학을 시키기로 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이 모두가 훌륭하게 판단하고 실행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우리네 세상살이에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남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그런 어떤 법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지요. 다만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이라 생각합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더니, 옳은 말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내 삶도 바뀐다’라고 여깁니다. ‘인간에게 집이란 어떤 의미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집이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관계 속에 의미가 있지 않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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