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가족, 그리고 어느 한 남자의 사는 법
많은 남성이 중년을 넘어서면서부터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려는 꿈을 꾸곤 합니다. 젊은 날 아내와 함께 그토록 소망하며 이룬 단란한 가정, 그곳엔 사랑이 켜켜이 쌓여있고, 따스한 위로와 변치 않는 지지가 있습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아온 것은 물론, 최고의 안식처를 이룬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년의 나이는 또 다른 무엇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중년의 이율배반적인 욕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자기영역에 대한 배타적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어떤 행태로든 자기영역에 대한 배타적인 욕구를 가진다고 합니다. 풀 한 포기, 작은 곤충 한 마리조차도 그럴 것입니다. 저명한 사회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은〈인간의 본성에 대하여〉에서 밀도요인에 기초한 영역욕구단계를 설명하였고, 〈통섭〉에서는 ‘인간은 명백히 영역의 동물이다.’라고 한 바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본성을 동물 본성의 연속선상에서 설명하려는 이런 사회생물학적인 입장이 본능보다는 학습 혹은 환경을 중시했던 지식인들에게 강력한 비판을 받아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필자의 이해력이 그리 깊은 학문적 부분까지 미치지는 못하는 것이고, 다만 일정부분 ‘자기영역 욕구’라는 부분에 동감하는 부분이 있어 말씀드릴 뿐입니다. 아무튼 이런 입장이라면 ‘자기영역의 확보’는 개체의 생존을 위한 가장 원초적인 문제로 보입니다. 자기영역을 빼앗겼을 때 그 생존은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배타성은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생존을 심각하게 위협받기도 합니다. 따라서 뭇 생명체들은 크고 작은 집단을 이루어 공간을 공유하는 한편, 서로 도움을 주고받음으로써 공동의 생존을 도모합니다. 배타적 영역의 일부를 희생함으로써 집단으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루어진 집단이 작게는 우리가 이룬 가정이며, 크게는 사회나 국가체제라고 생각합니다. 집단 내에서 개인에게는 필연적으로 자기희생이 요구됩니다. 집단의 존속을 위해 나름의 규칙과 금기가 만들어지고, 그에 따라 개인의 절대적 자유는 제한되며, 배타적 자기영역 또한 침해됩니다.
사회가 그렇듯 가정 또한 공유의 영역입니다. 가족 구성원들은 유무형의 영역을 각각 조금씩 나누고 공유하며 살아가지만, 성장하고 발전하면서 어느 시기가 되면 각자의 영역에 대한 변화의 요구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영역에 대한 욕구의 변화에는 비단 물리적인 측면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며, 그 원인 또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필자가 짚어보고자 하는 것은 남성들이 중년을 넘어서는 시기에 일어나는 자기영역 확보에 대한 욕구입니다. 어떤 경우이든 이런 전환기의 상황에서 공간제어에 실패한다면, 가족 구성원들은 종종 신경증을 앓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영역이란 단지 공간, 즉, 장소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필자는 이 부분을 유념해서 살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중년을 넘어서는 즈음 아내의 영역은 확고해져 있습니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라면 어느 정도의 차이를 보이기도 하겠지만, 사실 집안 어느 부분이든 남편의 영역이라 할 만한 부분은 별로 없습니다. 얼핏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이 집의 가장이니, 모두가 나에 속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논리적으로는 맞을지 모르나 심리적으로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대체로 남편들은 바쁜 직장생활, 사회관계망 형성을 위해 대부분 시간을 밖에서 보냅니다. 집에 들어오면 아내가 정리해둔 깨끗한 거실에서 단 몇 시간, 그리고 안방에서 잠을 자고 다시 밖으로 나섭니다. 그러나 아내는 그렇지 않습니다. 거실이나 주방 등 집안의 곳곳에 모두 아내의 손길이 닿아 있습니다. 갖가지 가구, 침구, 커튼, 주방기구, 화초 등 모든 집안의 공간이나 기물들이 아내의 취향에 따라 정리되고 꾸며집니다. 아내는 이렇게 자신이 꾸민 영역을 자신에 속한 온전한 것으로 여깁니다. 남편은 단지 정성스레 꾸민 자신의 영역에서 쉴 권리가 있는 사람이지, 온전히 그곳을 차지하거나 함부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쁜 직장생활에서 놓여나 약간의 여유를 갖게 되는 중년의 남성, 또는 정년퇴직을 맞은 남성이 자신의 집에서 느끼게 되는 야릇한 압박감, 그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입니다. 아내의 영역을 침범했기 때문입니다. 그 압박감은 아내의 영역에 너무 오랜 시간 머물렀거나, 그것을 바꾸려 했던 것이기 쉽습니다. 이로 인해 아내로부터 신경증적인 무언의 압박이나 제지를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내를 비난할 일은 아닙니다. 아내 자신조차도 자신의 이런 신경증이 무엇 때문인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단지 무언가 거북한 것이 느껴졌을 뿐입니다.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자신의 영역이 침해된 것에 대한 본능적 반응일 테지요. 남편 또한 아내가 꾸며놓은 그곳이 편안하고, 안락하고, 깨끗하지만, 어쩐지 만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모를 뿐입니다. 이런저런 거북함에 때론 싸움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싸움 끝에도 무엇 하나 해소되는 것은 없습니다. 이유도 모른 채 하는 싸움이니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중년을 넘어선 남성들은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을, 누군가와 공유할 곳도 아닌, 오직 자신만을 위한 공간을 꿈꾸게 됩니다. 용기를 내어 농막을 짓거나 별채를 따로 마련하기도 합니다. 별채를 갖는 것이 중년남성의 로망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마음껏 게으름을 피운다고 해도, 별난 취미나 괴팍스러움으로 난장판을 만든다고 해도 좋을 테니까요.
미국의 아동문학가 쉘 실버스타인은〈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 The missing piece〉에서 이가 빠진 동그라미가 자신의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마도 원작보다는 이 이야기를 차용해 나원주가 작사하고 보컬그룹 활주로가 노래한 <이가 빠진 동그라미>를 통해 더 많이 알려진 것 같습니다.
이야기 속 ‘이가 빠진 동그라미’는 결핍된 한 조각을 채워 완전해지고자 길을 떠납니다. 이가 빠진 탓에 완전하지 않아 빨리 구를 수 없었던 동그라미는 자주 멈추어 서서 쉬면서 벌레를 만나 이야기하고, 꽃향기에 취하고, 나비를 만나 놀아주기도 하면서 천천히 여행합니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지만, 오랜 여행 끝에 동그라미는 드디어 자신에게 꼭 맞는 짝을 찾게 됩니다. 짝을 만나 완전함을 이룬 동그라미는 기쁨을 안은 채 다시 여행합니다. 이제는 예전보다 훨씬 빨리 굴러갑니다. 그러나 이젠 멈출 수가 없습니다. 벌레도, 꽃향기도, 나비도 그냥 스쳐 갑니다. 예전엔 이 빠진 부분이 입이 되어 노래도 부를 수 있었는데, 이젠 완벽하게 짝이 들어맞아 소리도 내지 못합니다. 이제는 다시, 부족했지만 혼자이기에 여유롭고 자유로웠던 시절이 그리워집니다. 동그라미는 결국 그토록 갈망했던 한쪽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다시 불완전하고 결핍된 ‘이가 빠진 동그라미’가 되어 다시 길을 떠납니다.
쉘 실버스타인이 이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진지한 무엇이 있을 것입니다. 또 세간에는 이 이야기를 두고 여러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우화에 꼭 맞은 정답이 어디 있겠는지요. 필자는 이 이야기를 오늘날을 살아가는 중년의 남성이 느끼는 욕구에 빗대어보고 싶습니다. 태어나 성장하고, 짝을 만나 사랑하며 긴 인생길을 걸어왔지만, 대체로 그 길이 그리 녹록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걸음걸이는 언제나 급한 잰걸음이거나 뜀박질이었을 테니, 주변을 둘러보거나 자신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여유를 갖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너무 빠르게 달린 나머지 이제는 몸도 마음도 지쳤습니다. 조금은 느릿한 걸음을 걸으며 숨도 고르고, 자신의 매무새를 돌아보기도 하면서 멀찍한 시선으로 어느 곳을 쳐다볼 수도 있는 여유로움을 갖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공간은 잰걸음이나 뜀박질하기에 최적화된 곳이므로 그런 것을 허용할 여유가 없습니다.
새로운 느릿한 걸음을 걷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공간제어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별채를 꾸미는 것이 동그라미가 자유를 찾고자 제 짝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길을 떠나는 것처럼 단지 어떤 공간으로의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면 많이 서글픈 일이 아니겠는지요. 동그라미는 짝을 찾으려고 헤매던 어떤 조각을 만나자 이렇게 말합니다.
"너 혼자서도 잘 굴러갈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또 모를 일입니다. 마음은 언제나 바뀌는 것이니, 동그라미는 언제쯤에는 다시 그 옛날 꼭 맞는 짝을 만나 힘차게 굴러가던 그 시절을 그리워할지도 모릅니다.
‘살기 좋은 집짓기’는 그런 공간의 회피가 아니라 각각의 공간에 대한 공유와 분할을 통한 공간제어를 통해 남은 길을 함께 걸어 완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새로운 걸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형태는 벤 다이어그램으로 나타내는 교집합 모형과 같을 것입니다. 즉 교집합 부분이 공유의 공간이 되며, 그 외의 부분은 분할의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집합 부분을 벗어나는 분할공간은 잠시의 여유로움을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규모면 족할 것입니다. 우리네 부부가 함께하는 인생길은 동그라미처럼 그렇게 슬그머니 내려놓고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취미활동을 위한 공방으로 이용하려고 별채를 계획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별채가 완성되고 보니 공방으로 쓰기에는 너무 깔끔하고 부담스러운 규모라 어쩔 수 없이 별채는 손님방 겸 서고로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목수들의 지나친 배려로 너무나 반듯한 거실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아내가 소장한 책이 예상외로 많아서 2층 서재와는 별도로 책을 보관할 장소가 필요했던 것도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 공간은 여름철이면 다른 거실에 비해 실내온도가 높아지는 2층 서재를 보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결국 필자가 필요로 하는 공방은 창고 안에 조그맣게 따로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필자가 즐겨 하는 것은 주로 목기 제작이므로 그리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조금 좁은 감이 있기는 합니다. 이후 여유가 되면 좀 더 확장해 볼 요량입니다.
중년의 문제는 남아도는 시간에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대체로 퇴직을 한 분들은 갑자기 늘어난 유휴시간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처음 얼마간은 여행을 다녀오고, 친구들도 좀 만나고, 그동안 소홀히 했던 건강을 챙긴다면서 장비를 사서 등산이나 낚시를 하러 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여가활동에 남다른 취향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곧 흥미를 잃고 맙니다. 그것이 오랫동안 지속될 만큼의 것이었다면 바쁜 직장생활 중에도 이미 했을 것입니다. 나름의 이렇다 할 취미는 단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인데, 바쁜 직장생활로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스스로 소심해질 차례입니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또 다른 무언가를 찾아 나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그 결과는 온전히 아내의 몫으로 돌아옵니다. 공간의 영역뿐만 아니라 시간의 문제가 덤으로 파고드는 것입니다. 때맞춰 식사를 챙겨줘야 하고, 말동무도 해주고, 때로는 위로도 해주어야 하는 의무 아닌 의무가 새로이 생겨납니다. 한편, 남편의 잔소리는 늘어납니다. 그동안 바쁜 일상으로 흘려버렸거나 보이지 않았던 여러 상황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녀, 이웃, 집안 정리 등 모든 것이 마땅치를 않습니다. 여기에는 스스로 소심해진 것도 한몫할 것입니다. 이제 이후의 일들은 불을 보는 듯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부부가 중년을 넘어서는 전환기가 되면, 이런 이유로 서로의 공간제어에 실패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분이 퇴직 인사를 하면서 ‘제2의 인생’을 말합니다. ‘제2의 인생’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이 단지 퇴직 이후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필자는 그것을 인생의 수축과정이라 여깁니다. 지금까지의 인생 여정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장성하는 확장의 과정이라면, 이제 ‘제2의 인생’부터는 안으로 수축하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우주 운행의 주기를 바로 인식하여 씨 뿌리고, 추수하고, 갈무리하듯, 자신의 인생에 대한 주기를 바로 인식하고, 갈무리를 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 여정의 변곡점에 선 지금부터는 태어나고, 성장하고, 장성하는 확장의 과정을 살아온 것처럼, 그 반대로 수축의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확장만을 고집하다 보면 인생의 마무리를 제대로 못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놀이터가 달라지면 게임의 방식이 바뀌듯, ‘제2의 인생’ 또한 그에 걸맞은 삶의 방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를 위한 공간과 시간의 재조정, 여기에 ‘살기 좋은 집짓기’의 의미가 있습니다.
기존의 아파트 구조에서는 이런 공간제어가 불가능합니다. 가장 효율적인 공간계획이며, 현대의 도시인이 살아가기에 가장 편리한 주거시설이기는 하지만, 그곳은 인생에 대한 고려가 없는 공간입니다. 아파트는 그 특성상 거실을 중심으로 각각의 실들이 배치된 집중구조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가족 구성원의 동선은 거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주방, 화장실, 거실, 출입문 등으로 통하는 각각의 동선은 서로 겹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각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면 서로는 완벽히 차단됩니다. 오히려 이런 조건이 자녀의 육아, 교육, 직장생활 등에는 아주 효율적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년을 넘어서는 시기가 되면 여러 조건이 바뀌게 됩니다. 자녀의 문제에서도 어느 정도 놓여났고, 시간은 여유롭습니다. 그러나 그런 조건을 담아낼 공간이 마땅치 않은 것입니다. 종일 방에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고 아내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도 정도의 문제입니다.
아파트 공간, 그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거실을 혼자 차지하고 시간을 보낼 수도 없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거실은 모든 가족 구성원의 동선이 겹치는 공간입니다. 매일 그렇게 남편의 모습이 보이면 신경증이 돋지 않겠는지요. 설혹 아내와 TV라도 함께 볼라치면 부부간에도 서로 선호하는 TV채널이 있어 그것마저 그리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소일거리를 찾아 밖으로만 나돌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필자의 ‘살기 좋은 집짓기’는 이와 같은 유무형의 공간과 시간을 재조정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