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가족, 그리고 어느 한 남자의 사는 법
필자는 집을 지으면서 목수들이 일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보아왔지만, 그들만큼 즐겁게 일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사회가 인정하는 좋은 직업이라는 것, 그것은 대체로 급여 수준이나 복지수준, 업무 여건 등으로 평가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목수라는 직업은 그리 선호될 만한 직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소득수준이 그리 높지 않음은 물론, 복지수준은 기대하기조차 힘들고, 작업 여건은 위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즐겁게 일합니다. 놀이가 아닌, 노동이란 분명 수고로움입니다. 그런데, 그런 수고로움 속에서 기쁨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필자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최소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노동이 주는 즐거움, 그것이 땀 흘려 일하는 육체적 노동이든,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정신적 노동이든, 그 과정이나 결과로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의미에서의 노동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최승노는〈노동의 가치〉에서 노동은 삶에서 중요한 요소라고 하면서, ‘자유롭고 주체적인 노동’이 보다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성취할 수 있도록 이끈다고 했습니다. 만약 그들의 일이 강제된 노역이라면, 또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면, 그들은 그것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없었을 테지요.
많은 현대인이 자신의 직업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필자는 그 이유가 그들이 직업을 선택할 때 진정으로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보다는, 사회적 평가가 높은 직업을 선택하도록 암묵적인 강요를 받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얻어진 직장에서 개인은 자유롭지 못하며, 주체적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조직구조 속에서 하나의 부속으로 작동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개인은 더욱 움츠러들고, 상사의 눈치를 살펴야 합니다. 때로는 그 결과물에 스스로 의미 부여를 해보기도 하지만 결국 그것은 허상일 뿐, 온전한 내 것이 아니기 쉽습니다. 좀 더 젊은 날에 이 직업을 접할 수 있었다면, 필자는 아마 목수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필자는 어린 시절부터 사계절 중 여름을 가장 싫어했습니다. 여름철은 무덥고, 뜨겁고, 눅눅하고, 끈적끈적합니다. 극성스러운 모기들, 파리와 온갖 날벌레들이 사람을 지치게 만듭니다. 이런 짜증만을 안고 쉰 몇 번이 넘는 여름을 용케도 보냈습니다. 앞서 프롤로그에서 ‘철없다.’, ‘철모른다.’, ‘철부지다.’라는 말에 대해 말씀드렸듯이, 이 말은 바로 계절의 변화, 즉, 세시를 알지 못한다는 뜻이며, 세시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곧 농사와 관련한 우주 운행의 주기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니,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필자는 쉰이 넘는 나이에도 아직 철이 들지 못했습니다.
눅눅함과 극성스러운 모기들을 탓했을 뿐, 여름철의 의미들을 모른 채 쉰이 넘는 세월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필자는, 그 여름날의 불볕더위와 비바람이 없다면 뭇 초목들은 좋은 결실을 얻지 못할 것이며, 입하, 소만, 망종, 하지, 소서, 대서 등으로 이어지는 세시를 올바로 지켜 제때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물을 대고 끊어주지 않는다면, 우리의 먹거리는 한낱 쭉정이가 되고 말 것임을 압니다. 또, 여름은 모기나 들끓는 지루한 계절이 아니라 뭇 생명을 키워내는 그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머리로만 아는 어쭙잖은 지식일 뿐, 몸과 마음은 그것을 거부합니다. 도심의 생활에 젖어있는 우리의 몸은 여전히 콘크리트 바닥에 내리쬐는 태양 볕과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후끈한 열기와 악취, 모기떼가 더 얄밉기 때문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여름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불볕더위를 감내하며 땀 흘리는 수고로움과 그로부터 오는 즐거움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여름철이 그리워질 수도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