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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머리오리 Jan 28. 2021

££ 1. 프롤로그

집, 가족, 그리고 어느 한 남자의 사는 법

조용하고 전망 좋은 곳에 자신만의 특징 있는 집을 마련해 아담한 정원을 가꾸고, 텃밭이라도 조금 일구면서 살아가는 것, 멋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대부분은 아파트라는 문명이기의 결합체에 모여 삽니다. 2019년 기준 통계청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주택 유형은 아파트가 전체의 50.1%, 단독주택 32.1%, 연립주택 2.2%, 다세대주택 9.4%, 비거주용 건물 내 주택 1.6%, 주택 이외의 거처 4.6% 등으로 나타납니다. 규모의 차이일 뿐 아파트와 같은 형태인 연립, 다세대주택을 포함한다면 61.7%가량이 공동주택 형태의 주택인 셈입니다.


이처럼 아파트를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주거의 편의성 때문이겠지요. 필자는 아파트라는 주거시설이 인류가 지금까지 개발해온 주거시설 중 가장 탁월한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층간소음이나 주차 문제 등으로 이웃과 얼굴을 붉혀야 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구조의 건축을 허용한 탓이지 아파트가 가진 본질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외국의 경우와는 달리 우리나라의 건축법규는 하나의 격벽을 공유하는 구조로 세대를 구분하고, 위층의 바닥은 바로 아래층의 천장이 되는 구조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주차장 또한 각 세대가 보유한 차량수에 비해 주차공간이 너무 적고, 차량 1대당 허용된 주차면적이 너무 협소합니다. 이것은 모두 비용의 문제와 맞닿아 있는 것이지 아파트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아파트 단지 내에는 슈퍼마켓이나 세탁소 등을 비롯한 각종 편의시설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공부방, 헬스장, 경로당 등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첨단보안시스템을 통한 24시간 방범 체계가 갖추어져 있고, 수도·전기의 공급이나 오수·생활 쓰레기의 처리 등 어느 것 하나 불편한 점이 없습니다. 게다가 단지가 도시에 위치하므로 전화나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각종 식료품이나 생활용품을 언제든 배달받을 수 있습니다. 이만큼 편리한 주거시설이 또 어디 있겠는지요. 단지를 벗어나지 않고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런 편리성에 못지않게 경제성도 뛰어납니다.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이기에 토지는 서민이 선뜻 구입하기에는 너무나 고가입니다. 특히, 도시지역에 있는 토지는 여간해서는 엄두도 못 낼 일입니다. 그런데 아파트 주거시설은 이런 토지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해주고 있습니다. 고층의 아파트를 건축함으로써 토지의 이용률을 높여, 동일규모의 단독주택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제공됩니다. 물론 이것은 상대적인 개념이지 아파트의 가격이 절대적으로 저렴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무튼, 아파트는 편리하고 경제적인 주거시설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필자는 이런 아파트에 살면서 갑갑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오랜 기간 쓸 것 안 쓰며 저축해서 마련한 내 집이건만 뭔가 부족함이 느껴졌습니다. 아늑하지 않습니다. 내 집에 대한 애정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냥 내 가족이 몸을 누이고 밥을 먹는 공간일 뿐입니다. 분명 내 집인데도, 내 집에 대해 딱히 무언가 할 일이 없었습니다.


할 일이 없다는 건 사실 어폐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맞벌이 부부이니 퇴근 후에 해야 할 집안일은 많습니다. 아내와 함께 퇴근해서 청소하고, 밥 짓고, 설거지하고, 세탁실에 던져져 있던 빨래도 해야 합니다. 주말에는 밑반찬도 만들어 둬야 하고, 아이들 데리고 외출도 해야 합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서 아내와 영화도 가끔 보아야 하고, 책도 좀 읽어야 하고, 친구나 동료들을 만나 술 한 잔 기울이기도 해야 합니다. 이렇게 바쁩니다. 사실 필자뿐만 아니라 현대인들은 모두 일상이 이렇듯 빠듯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뭔가 할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무력해집니다. 그러다 어느새 우울해지곤 합니다. 중년을 넘어서는 많은 남성이 느끼는 공통된 특징이 아닐까요.


현대인들의 혼인연령이 높아져 결혼을 늦게 한다고들 하지만, 이때쯤 되면 부부간의 치열함도 어느 정도 타협점에 이르고, 직장생활에서도 연륜이 쌓여 여유를 가질만한 나이입니다. 아이들 키우는 것도 조금은 수월해지는 기분도 들 것입니다. 대체로 이쯤에서 남성들은 허리를 펴고 눈을 들어 주변을 돌아볼 시간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말에 ‘철없다.’, ‘철모른다.’ ‘철부지다.’라는 표현이 있지 않습니까. 이는 ‘사리를 분별할 만한 지각이 없는 사람, 시속에 어두운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철은 계절을 의미하며, 그 뜻에는 올바른 세시를 알지 못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름에 두꺼운 옷을 입고 겨울에는 여름 홑바지를 입는, 가을에 씨를 뿌리고 봄에 추수하려는 것처럼, 때를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입춘이니, 처서니 하는 24절기 세시풍속은 곧 농사와 관련한 우주 운행의 주기성을 인식한 결과로써, 이를 모르는 사람은 건강한 삶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며, 이에 순응하며 현명하게 대처하는 자는 곧 사람 사는 지혜를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옛날 농경사회에서는 사내아이가 15세 전후가 되면 철이 들었다고 하고, 품앗이 몫도 어른 품을 쳐 주었습니다. 이 나이가 되면 우주 운행의 주기성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하여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얻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인의 철듦은 참으로 느리기도 합니다. 최근 영국의 어린이 채널인 니켈로디언 UK가 웬델&비니 쇼 방송 개시를 기념해 연구기관에 위탁해 진행한 연구조사에서 남성들의 철드는 나이가 평균 43세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물론, 영국의 경우 우리와 같은 ‘철듦’이나 ‘철없음’이라는 개념의 용어는 없을 것이니, 여기서 ‘철드는 나이’란 아마도 ‘성숙한 나이’ 정도가 의역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우리로 치면 ‘철드는 나이’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을 테지요. 그렇다면 43세라는 나이, 이 나이쯤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한 번쯤 뒤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위와 같이 농경사회에서의 철듦이란 의미가 ‘씨 뿌리고 추수하는 절기를 안다’라는 것이며, 이는 곧 ‘우주 운행의 주기성에 대한 인식과 그에 대해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가졌다’라는 것이라면, 현대인의 철듦이란 ‘자신의 인생에 대한 주기를 바로 인식하고, 그에 대해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가졌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평균 43세의 철듦이라는 말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아무튼 이런 시기가 되면 남성들은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공간, 자신의 가족만을 위한 공간을 꿈꾸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만 희망 사항일 뿐, 실제로 그것을 이루고 사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이사를 하고, 집도 지을 수 있는, 시간적, 경제적 여건을 가진 일부 상류층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필자가 이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상층에 속하는 사람들의 주거시설이나 특별한 취향을 지닌 분들의 집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공간을, 내 가족과 함께 할 편안한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하는, 필자와 같은 보통의 분들이 꿈꾸는 그런 집입니다. 따라서 그 집은 ‘멋진 집’이 아니라 ‘살기 좋은 집’입니다.


 ‘멋진 집’은 세상에 많습니다. 풍족한 자금력으로, 풍광 좋은 위치를 선점하고, 값진 건축자재를 사용해 짓는다면 나름 멋진 집이 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유명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겨 예술적인 미감을 더하도록 한다면 한층 돋보이는 집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남들이 보기에만 ‘멋진 집’이기 쉽습니다. 반면, ‘살기 좋은 집’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살기 좋은 집’이란 꼭 내 옷과 같아야 합니다. 내 몸에 맞지 않게 지어진 옷은 제아무리 값진 것이라도 어딘가 불편하고 볼품없는 것처럼, 집 또한 가족 구성원의 수나 나이, 취향, 직업적 특성, 생활 동선 등을 고려해 짓지 않으면 그 집은 ‘살기 좋은 집’이 되지 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살기 좋은 집’이란 곧 ‘주인을 닮은 집’입니다. 따라서 필자가 이 글에서 소개해드리는 여러 말씀은 ‘살기 좋은 집’을 짓기 위한 참고사항일 뿐입니다. 즉, 꼭 필자가 소개하는 대로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라는 정도로 이해된다면 그로 족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생긴 모습이 각각 다르듯, 사물을 보고 이해하는 방식이나 취향, 가족적 특성 또한 아주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림 1-0-1】 ‘멋진 집’은 세상에 많습니다. 그러나 ‘살기 좋은 집’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 글은 필자가 직접 초안 설계를 하고 지은 집과 그 안에서의 삶을 소개한 글입니다. ‘살기 좋은 집’이라는 화두로 글을 한번 엮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지만, 그동안 선뜻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필자의 성근 글재간이겠지만, 사진 촬영기술 또한 자동카메라를 조작하는 수준밖에 안 되는 것이고, 또 막상 입주해 살다 보니 아, 하며 구상에 소홀히 했던 것들을 발견하기도 하는 것이었기에, 필자가 이렇듯 모자라는 재주와 식견으로 글을 엮는다는 것이 제 주제를 모르는 짓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의 ‘이 집에 120% 만족한다.’라는 말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살기 좋은 집’을 짓는다는 것은 나와 내 가족이 행복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는 뜻입니다. 거기에는 전문가적 식견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가족에 대한 세심한 공간의 배려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필자는 최소한 이 부분만큼은 성공한 것 같습니다. 용기를 준 아내에게 감사합니다.


사실 필자는 26년여를 현장에서 보낸 전직 소방관으로,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도 아니며, 건축에 대해 이렇다 할 식견도 없습니다. 따라서 글은 성글고, 때론 헛된 소견도 있을 것입니다. 앞서 밝혔듯 필자는 필자와 꼭 같은 분들께 그냥 옆집 아저씨에게 내 집 보여주며, 나는 집을 이런 이유로 지었느니, 이렇게 지었느니, 하면서 자랑삼아 주워섬기듯 소개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다 보니 살아가면서 겪는 이런저런 어설픈 삶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모쪼록 푸념 글이나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혹시 어쩌다 이 글을 주워보시게 되는 독자들께서는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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