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가족, 그리고 어느 한 남자의 사는 법
우리는 종종 선택의 문제에서 머뭇거리곤 합니다. 지나친 머뭇거림으로 타인에게 선택의 기회를 빼앗기기도 하고, 때로는 묵시적으로 양도하기도 합니다. 그 결과값이 좋은 경우, 스스로 이렇게 위안합니다. ‘그렇게 하길 잘했어. 그때는 좀 기분이 상하기는 했지만, 내가 결정했더라면 틀림없이 안 좋은 결과가 나왔을 거야.’
반대로 결과값이 좋지 않게 나오면, 쉽게 타인의 탓으로 돌리기도 합니다. ‘왜 남의 일에 감 놔라, 팥 놔라, 해서 이 모양을 만들어 놓는 거야?’ 그러나 과연, 그 책임이 타인에게 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애초부터 그 선택의 문제는 자신에게 속한 것이므로, 결과가 좋든 그르든, 그 책임 또한 오롯이 그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 아니겠는지요. 결국, 자신의 문제를 타인이 결정케 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을 의미 없는 존재로 만들고, 그 책임만 떠맡은 꼴입니다.
사르트르가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 했다지요. 위대한 학자의 철학적 성찰에서 나오는 말씀의 깊은 뜻을 어찌 속속들이 알 수 있겠습니까만,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소한 선택에서부터 인생 전체가 결정될 수 있는 중대한 선택까지 무한한 선택을 해야 하며, 그렇게 살다 보면 때로는 ‘결정 피로’가 쌓여 머뭇거리거나, 압박에 못 이겨 비이성적인 고위험의 결정을 해 버리거나, 그마저도 감당치 못해 아예 회피해 버리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 선택은 오로지 그 자신의 몫이라는 것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연관시켜보면, 자그마한 집을 하나 짓는 문제 또한 수많은 선택의 과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는 오롯이 건축주의 몫입니다. 건축주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 주택의 성패가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 선택에는 부지의 위치, 공간계획, 안전성의 확보 등 여러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모로 잘 살펴서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그리 수월하지는 않습니다. 하나하나 모두를 챙겨야 하는 것에서 오는 피로감은 물론이고, 잘 모르는 어떤 것을 결정해야 할 때는 그 압박감이 여간 크지 않습니다. 최선은 많이 아는 것이겠지요. 배경지식, 즉 폭넓은 앎이 뒷받침된다면 그 결정은 훨씬 수월해질 것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제1권 머리말에 정조 때의 문장가인 저암 유한준 선생의 글 일부를 고쳐 인용하면서 유행어처럼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인용된 해당 구절의 원문은 ‘(책을)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볼 줄 알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그저 모아두는 것만은 아니다’라는 뜻으로, 당대의 수장가였던 석농 김광국 선생의 책에 대한 안목과 사랑하는 마음을 찬하는 내용입니다. 유홍준 교수는 이런 저암 선생의 글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멋진 말을 찾아냄으로써 많은 사람이 우리의 문화유산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지만, 저암 선생의 글을 보면, 볼 줄 안다는 것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볼 줄 아는 것, 즉, 어떤 것에 대해 안목을 가진다는 것은 배워서 익히고, 그 앎이 바탕이 되어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이 깊은 후에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남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일까요. 하물며 그것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면 크게 찬사를 받아 마땅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앎과 사랑이 있은 연후에야 볼 줄 알게 된다는 것이니, ‘안목을 가졌다’라는 말에 이처럼 대단한 찬사의 의미가 있었는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필자가 말하는 ‘살기 좋은 집짓기’는 몹시 주제넘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앎조차도 얕은 주제에 이런 글을 쓰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위안해 봅니다. ‘살기 좋은 집’을 짓겠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긍정의 발로입니다. 저암 선생의 글에서 이를 찾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사랑이라고 달리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선비는) 알게 됨으로써 (책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함으로써 그에 대한 안목을 가지겠지만, ‘살기 좋은 집’을 지으려는 사람은 삶의 긍정으로 ‘살기 좋은 집’을 지을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살기 좋은 집’이란 ‘주인을 닮은 집’이며, 그것에는 집주인이나 그 가족의 독특한 개성이나 취향, 생활양식 등을 충족시키는 것이 포함됩니다. 따라서 ‘살기 좋은 집’이란 그렇게 쉽사리 지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아주 편안한 집도 어느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론 감당하기 어려운 집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에 멋진 집은 많이 볼 수 있어도 ‘살기 좋은 집’이 없는 이유입니다. 이사할 집을 찾아다녀 본 분들이라면 잘 아실 일입니다. 수많은 집들이 있지만, 자신의 마음에 흡족한 집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습니다.
이처럼 ‘살기 좋은 집’이란 집주인을 비롯한 그 가족의 특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집은 그에 걸맞게 지어져야 합니다. 그것을 건축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건축적 지식과 안목이 있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하지만 건축주에게 건축적 지식은 물론이거니와 차원을 달리하는 그런 안목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러나 건축주에게는 전문건축업자에게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 그리고 그 가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점을 꺼리는지, 어떤 취향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긍정과 사랑에서 비롯된 ‘살기 좋은 집짓기’에 대한 깊은 애정입니다. 이 두 가지는 건축주에게 쉽사리 자신의 집에 대한 안목을 가질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전문가적인 지식은 없을지라도 최소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살아가는데 가장 편안한 집이 어떠해야 하는지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비가 책에 대한 안목을 가지는 것은 오랜 세월 차근차근 쌓아온 배움에서 오는 앎이 바탕이 되는 것이지만, ‘살기 좋은 집짓기’에서 건축주가 갖는 안목이란 삶의 긍정에서 오는 자기 사랑이 바탕이 된다고 믿습니다. 전문적인 건축기술이야 전문기술자가 알면 될 일입니다. 건축주는 기초적인 상식을 갖추는 것으로 족합니다. ‘살기 좋은 집짓기’에 관심을 두고 있으면 자연스레 건축기술에 대한 상식도 쌓이고 흥미도 생기게 됩니다. 아래 소개하는 몇 가지는 건축주가 알아 두어야 할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니 당연히 지켜져야 하지만, 오히려 실제 건축현장에서는 소홀히 취급되는 경우가 종종 있으므로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문화유산이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한다면, ‘살기 좋은 집짓기’는 ‘아는 만큼 갖출 수 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살기 좋은 집’의 준비과정과 여러 선택의 문제들을 하나하나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