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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아빠의 썰매

by 정가을


초등학교 시절 눈이 올 때면 할머니 댁에 가서 썰매를 타곤 했다. 인천에 있는 사리울이라는 곳인데, 그때는 산과 논, 밭이 있고 약 20가구 정도가 옹기종기 살고 있었다. 그때는 시골이었는데, 여기도 30년쯤 전에 재개발이 되어 지금은 완전 아파트촌이 되었다.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으면, 아빠는 어디에서 찾았는지 쌀 포대와 장판 쪼가리를 챙겨놓으셨다. 주말 아침에 눈을 뜨고, 일기예보대로 정말 눈이 온 날은 버스를 타고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먼저 딱딱하게 언 밭에 모닥불을 피우고 몸을 녹인 후, 지칠 때까지 썰매를 탔다. 눈으로 덮인 경사진 밭의 꼭대기에 올라가 쌀 포대나 장판 쪼가리를 깔고 앉는다. 둘 다 표면이 매끄러워서 눈에 아주 잘 미끄러지는 완벽한 썰매의 역할을 했다. 이 간이 썰매의 앞쪽을 손으로 잡고 땅에서 발을 떼고 출발하면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었다.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고운 눈 위에서 타는 썰매는, 웬만한 썰매장에서 타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재미있었다.

눈이 오지 않은 날은 할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얼음 썰매를 가지고 꽁꽁 언 논으로 갔다. 먼저 아빠가 얼음이 단단하게 얼었는지 발로 얼음을 쾅쾅 치시며 확인하시고, 우리에게 논 얼음 썰매장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썰매 위에 앉아 있으면 어떤 날은 아빠가 끌어주시기도 하고, 어떤 날은 사촌들과 서로 밀어주기도 했다. 얼음 위에 드문드문 남아 있는 잘린 벼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얼마 전 아주 많은 눈이 왔다. 눈이 많이 쌓이자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썰매 타러 밭에 가자!”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다섯 살인 내 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지난 주말 내가 볼일을 보러 간 사이, 아빠는 내 아들을 데리고 밭에 가셨다. 이번엔 쌀 포대 썰매가 아니라, 내가 인터넷에서 산 플라스틱 썰매다. 아빠는 직접 피우신 장작불에 삼겹살을 구워 손주에게 고기도 잔뜩 먹이시고, 썰매도 태워주셨다. 아들은 할아버지가 썰매를 빠르게 끌어주셨다며, 가득 쌓인 눈 위에서 재밌게 놀았다고 신이 나서 말했다.


아빠도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얼음 썰매를 타셨다. 할아버지는 그 어렵던 시절 자식들에게 조금이라도 겨울 놀거리를 주시기 위해 썰매를 만드셨을 거다. 할아버지에게 받은 그 사랑을 아빠는 나와 내 동생에게 주셨다. 그러고 보면 그때는 지금처럼 주 5일 근무가 아닌, 주 6일 근무였던 시절이다. 그럼에도 아빠는 일주일에 하루 쉬는 일요일에, 직장생활로 인한 피로를 푸시기보단 우리에게 썰매를 태워주셨다. 그리고 지금은 그 사랑을 또 내 아들에게 주고 계신다.


이제 연세가 일흔 살이 다 되어 무릎과 허리 등 여기저기 관절이 아프다고 하시면서도, 손주 즐거우라고 눈밭에서 썰매를 끌며 달리셨을 그 모습을 상상하니, 나는 도저히 그 사랑을 따라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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