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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발 Oct 27. 2020

소중한 그대여, 고개를 들어요

Keep your chin up, my dear

한때 나는 바닥 인생을 살았다. 그 바닥이란 내 시야에 걸리던 풍경을 뜻한다.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다. 아스팔트 바닥, 시멘트 바닥, 자갈 바닥, 흙바닥.... 두 발바닥으로 바닥이란 바닥은 모두 섭렵해서 바닥에 일가견이 생길 정도였다랄까.


항상 단단한 사람이고 싶었다. 그러려면 모든 걸 혼자서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들어찬 고개가 무거워서 들 수 없었던 듯하다. 어깨도 축 처졌겠지. 친구는 물론이고 학교 선생님과 교수님까지. 길에서 스치는 이들이 불러 세우고는 기운 내라고 한마디씩 해주곤 했다. 알아서 스스로 척척 해나가고 있다고 자부했고 그것만이 내 유일한 자랑거리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주 오랫동안 꾸던 꿈이 있었다. 말로는 다할 수 없게 황홀하고 아름다운 꿈이었다. 문득 그 꿈을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불현듯 덮쳐왔다. 이십 대 후반의 일이다. 나는 졸지에 부표와 이정표를 잃고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매일 헛발질하는 기분으로 살았다. 언제나 시선이 바닥에 머무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일은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같은 자리에서 바닥 한 번, 정면 한 번 보기. 바닥만 보고 다니려면 단풍은 잊어야 한다. (c) 2020. 아이후(ihoo) all rights reserved.






그러던 어느 날, 종각 대로변에 붙은 3층 어느 커피숍에 들어가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노트북과 책을 펼쳤으나 눈에 들어오지 않아 통유리창으로 시선을 옮기게 되었다. 평소의 나처럼 고개를 푹 숙인 젊은이들이 한낮을 휘청거리고 있었다.


눈 부신 햇살 아래 서 있으면서 자신의 눈부심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들. 은행나무가 노랗게 익어가는 줄도 모르고 쪼개질 듯 새파란 하늘에 구름이 길을 내어 하얗게 흘러가는 줄도 모르고. 어쩌면 내가 아주 오랫동안 꾸던 꿈보다 더 아름다운 삶의 한 장면에서, 사람들은 바닥 장인처럼 걷고 있었다. 맞다. 그들은 모두 나였다. 나는 경악했다.


고개를 들고 걷기 시작했다. 그제야 커다란 나무가 입은 따뜻한 녹색 이끼가, 태양 빛에도 굴하지 않고 은은하게 내비치는 낮달이, 각자의 방향으로 후미등을 켜고 밤의 모퉁이를 도는 도로의 차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오래도록 꾸던 꿈보다 더 황홀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데, 다른 모든 이들은 자신이 향할 곳을 너무도 잘 아는 듯했다. (c) 2020. 아이후(ihoo) all rights reserved.






어떠한 생각에 골몰하면, 특히 어둠을 고르듯 한계에 다다르면 시야가 좁아진다. 아무리 좋은 풍광 앞에 서도 볍씨 한 톨만 한 고민만 눈에 들어온다. 내가 그랬다. 말캉말캉한 사람인 것을 감추느라 갑각류처럼 큰 방패를 뒤집어쓰고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지난날의 억울함을 씻어내기라도 하듯 손으로 이끼를 더듬고 눈으로 낮달을 좇고 온몸으로 자동차 후미 등불에 이끌리며 걸었다. 내가 살아 있음이 맥박처럼 느껴졌다.


"Keep your chin up."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기운 내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을 때 턱을 들라 한다. 턱을 들면, 그러니까 고개를 들면 시야가 넓어지고 왜곡 없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온갖 고민을 싸 짊어진 채라면 아무리 멋진 곳으로 여행을 떠나도 제대로 즐기기 어렵다. 반대로 고개를 들어 넉넉한 시야를 확보하면 매일을 눈부시게 여행할 수도 있다.


이것은 내가 일상을 여행하는 방법을 골라 모은 기록이다. 내 말캉말캉함이 부끄러울 만큼 속속들이 비어져 나오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갬성을 플렉스 하며' 살 테니까. 이것은 또한 내게 진정 소중한 이들이 고개를 들게끔 하는 주문이기도 하다. 부디 이번 한바탕 삶을 제대로 즐길 수 있길, 날마다 뜨겁게 여행할 수 있길.



<기운 내(Keep your chin up)>, 요시토모 나라(奈良美智, よしともなら),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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