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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발 Oct 17. 2024

사람들 사이에 '선'이 있다

그 선(레인)을 넘고 싶다*

신야 타카하시(Shinya Takahashi), 유타카 오노(Yutaka Ono) <인어공주(교원애니메이션명작)>



인어 공주에 대한 왕자의 사랑은 어린아이에 대한 사랑과 같은 것이었으며 인어 공주를 왕비로 맞는 일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참으로 큰일이었다.



선 넘는 오리발


언니들과 은근한 자리 경쟁에 달뜨던 나는 더 이상 앞자리로 나아가기를 포기했다. 27년간 유지해 온 그분들의 질서를 어떻게 파괴하겠는가. 대신 나는 더 빠르게 수영할 수 없는 이 상황을, 사실상 말도 안 되고 대책도 없는 저돌적인 선택으로 극적 타개했다.


"저 이 레인으로 가면 죽어요?"

수업을 마치고, 선생님에게 슬쩍 물었다. 매사에 시큰둥한 표정이 주특기인 줄로만 알았던 선생님이 뭔가 흥미진진한 걸 발견했다는 것처럼 표정을 싹 바꾸며 대답했다.

"죽지야 않죠. 내일부터 한번 해봐요."

때는 바야흐로 코로나19 팬데믹에 전 세계가 휘청이던 시기. 각 지자체가 운영하던 국공립 수영장 시설은 모두 문을 닫았다. 하루라도 수영을 쉬면 온몸에 거뭇한 땟자국이 생긴다고 믿기라도 할 법한 수영(중독)인들이 너도나도 사설 수영장으로 모여들었다. 내가 다니던 수영장에도 강호에 숨은 영웅 같은 고수들이 한창 포진해 있었다. 이들은 우리 바로 옆 레인에서 상어에게 쫓기는 청새치라도 되듯 수면 위로 몸을 튕기며 온갖 영법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다.


나는 엉겁결에 크고 작은 아마추어 대회를 휩쓰는 랭커들이 휘젓고 다니는 레인의 맨 꼴찌에 서게 됐다. 그들 모두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실력으로 거기에 낀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그냥 달려보기로 했다. 어차피 내 심장은 매일 아침 더 이상 몸이 견뎌낼 수 없는 속도감에 쾌재를 부르며 축제를 열고 엔도르핀 폭죽을 팡팡 터뜨리고 있었다. 더 고되게 수영하면 더 큰 쾌감에 빠져들 수 있겠지.

"넌 젊어서 조금 따라다니면 또 할 수 있어. 오리발, 파이팅이다!!"

언니들이 미심쩍은 눈초리를 감추며 뜨겁게 응원해 줬다.


예상했겠지만, 나는 레인을 몇 바퀴 못 돌고도 1번에게 따라 잡히는 신세가 됐다. 두 바퀴(100m) 자유형을 마치면 재빠르게 레인 끝에 붙어 진로 방해를 미연에 방지했다. 수영 실력은 형편없어도 그 정도 센스는 탑재하고 있다고! 훗. 가까스로 적응 비슷한 것을 하고 나니 이들의 수영 실력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그 수영장에서 가장 잘하는 사람들이 모인 두 레인 중 하나였지만(다른 하나는 아침 6시 반이었다), 그 레인 안에서도 실력은 월등하게 차이가 나 세 그룹으로 나뉘었다. 그만큼 선두는 강했다. 눈치 빠르게 분위기 파악을 마쳤음에도 내가 꼴찌라는 점은 한동안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 뭐 어때. 수영이 더 재미있는걸!



침묵하는 인어공주


왕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인어공주는 물거품이 되어 바다 위를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될 처지였다. 그런데도 그는 이웃나라 공주를 만나 행복해하는 왕자의 손에 입을 맞춘다. 아마 나라면 왕자 나라의 언어를 빠르게 배워 글씨나마 휘갈기며 "내가 널 구해줬어, 바보야!"라고 적으며 꺼이꺼이 울기라도 했을 것이다. 목소리까지 팔아넘기며 인간이 되어 왕자를 얻으려 했던 그 굳은 각오는 어디로 간 거야?! 어휴, 이 답답아!!


어릴 적에 읽을 때는 전혀 거슬리지 않았는데, 나이가 들어서 보니 이웃나라 공주 앞에서 처연히 물러나는 인어공주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다. 아니다. 실은 보통의 일상을 살아가는 나와 너무 닮았다. 간절히 원하다가도, 무언가를 얻거나 누군가에게 선택받기 직전 상황에 맞닥뜨리면 나는 대체로 별다르게 큰 노력을 들이는 일  없이 모든 것에 순응하려고 했었다. 앞서 얘기한 것과 같이 수영장 선(레인)을 넘기 전까지는. 그래도 이제는 조금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된 걸까?




*정현종 시인의 시 <섬>을 패러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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