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리발 Oct 18. 2024

두목님과 까치와 똘마니

내 몸 안에 희망의 증거가

에드먼드 듈락(Edmund Dulac), <인어공주(THE LITTLE MERMAID, 1911)>



그 순간 꼬리 대신 소녀들 다리처럼 희고 아름다운 두 다리와 발이 보였다. 하지만 완전히 벌거벗은 채였다. 인어 공주는 너무 부끄러워 얼른 긴 머리카락으로 몸을 가렸다.



인어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지금까지 내 허풍을 참을성 있게 들어준 당신이라면, 아마 내가 대단한 운동 신경을 타고났을 거라고 상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냥 바다에 던져진 조막만 한 물풍선이다. 수면에서 미끄러지듯 직진해 나아가는 대신, 열심히 위아래로 낭창거리며 가까스로 조금씩 움직인다.

"물은 천천히 잡고 당길 때만 힘을 세게 주세요."

자유형 팔 동작 요령을 들으면,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몸은 절대 그렇게 따라와 주지 않았다. 타고난 운동 감각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을 빠르게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경쟁심이 털끝만큼도 없다. 누군가를 꼭 이기겠다거나, 누군가보다 무언가를 더 얻고 싶다는 마음을 좀처럼 갖지 못하고, 행여 있다 해도 간절하고 길게 유지하지 못한다. 새로운 레인으로 옮긴 이후에도 피해만 안 주면 좋겠다고 마음 졸이며 인어처럼 헤엄치는 사람들 뒤를 간신히 따라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레인의 2번 자리에 서는 분과 엘리베이터에 함께 타게 됐다.

"수영 재밌어요?"

"네, 진짜 재밌어요!"

"그럼 주말에 같이 수영해요. 혼자 하면 안 늘어요. 같이 해야지."

그는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 주인공 산티아고를 무척 많이 닮았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꾸준한 쇠질로 연마한 거대 근육을 지닌, 누가 봐도 영락없는 체육인이다. 그 와중에 맑고 순수한 눈빛이 초롱초롱하기까지 했다. 좋은 사람이 주는 인상의 단편을 모으면, 아마 그분의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언니들과 함께 레인을 돌 때는 잠깐 걸으며 휴식하는 시간도 있고, 다른 분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도 있어서 자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레인을 옮긴 이후로는 10초 이상 쉬는 것도 좀처럼 허락되지 않아(쉼 없이 돌고, 또 돈다) 아예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낯가림이 심한 사람으로서 그의 제안 몇 번에 그저 웃기만 하다가 결국 이기는 동호회 정모에 나가기로 덜컥 약속해 버렸다.

"나오면 초급 레인에서 하면 되겠네."

'네? 수영장에선 연수반인데 동호회에선 다시 초급이라고요?'

대체 얼마나 수영을 잘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걸까. 궁금함 반 두려움 반으로 정모에 나섰다.


매번 레인 끝에서도 잘 못 따라가고 자주 쉬는 나를 답답한 듯 쳐다보던 같은 반 1번 자리에 서는 분도 거기에 있었다. 동호회 코치라고 했다. 10개 레인을 갖춘 수영장의 3개 레인에 모인 사람들은 얼추 눈으로 훑어도 30명이 넘을 것 같았다. 수영에 홀딱 빠진 이 동네 사람들은 다 여기에 모여 있나 보구나! 나는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매월 한 번씩은 기회가 되면 모임에 나가 수영하게 됐다.



인어공주의 사람 몸 적응하기


왕자의 손에 이끌려 궁전으로 간 인어공주는 그곳에서 제일 아름다웠다. 하지만 벙어리였기 때문에 노래를 부르지도, 말을 하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왕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 발끝으로 서서 아름다운 춤을 추었다. 어째서 우리는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무언가에 열중하고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걸까. 인어공주는 '왕자의 사랑'이라는 목표라도 있었지만, 파닥거리는 심장을 애써 모르는 척하며 수영장을 조금이라도 더 돌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었을까. 분명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나는,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비록 운동치라고 해도) 노력하면 차츰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의 증거를 스스로의 몸에서 찾으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제목에서 꺼내놓기만 하고 설명은 없어서 궁금해할까 봐 미리 얘기해 두자면, 레인 순번 2번은 두목님, 1번은 까치다. 물론 똘마니는 나다. 밤이 늦어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이런 별명을 지은 이유를 밝히는 것은 다음번으로 미뤄도 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