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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ff the record Aug 10. 2024

4. 귀신 보는 아이 현수와 친구 자훈이






#1     



귀신, 만월, 기억, 사서    



      

‘신 할머니는 왜.

민현수가 가장 기억하기 싫은 것과 지금 가장 소망하는 것이 좋은 소식이라고 했을까?

신 할머니는 학교를 제대로 못 다니셨는데.

이렇게 정자체로 잘 쓴 글씨체가 신 할머니의 글씨는 아닐테고...’    



           

신 할머니는 현수가 친손주는 아니지만, 아직도 매년 현수의 생일 때마다 손수 음식을 해서 서울로 올라오실 만큼 현수를 아껴주시는 분이시다.     


엽서와 신 할머니를 생각하던 현수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귀신과 기억이라니... 현수는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2 

    

현수가 어린 시절에도 할머니는 본채에서만 손님을 받았다. 

그래서 할머니를 찾는 손님이 아무리 많이 와도 현수 방이 있던 안채는 늘 조용했다.  

   

현수가 초등학교 때였다.

갓 4학년이 된 현수는 그 또래 남자아이들처럼 한창 블록에 빠져있었다.      

엄청 비쌌던 해적선 블록을 홍여사가 생일선물로 사준 적이 있었다. 


현수는 학교와 학원을 마치면 쏜살같이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설명서를 보며 아무리 열심히 손가락을 꼬물꼬물 움직여 봐도 해적선 블록을 완성하긴 어려웠다. 


초등학생이 만들 수준의 블록이 아니었다. 

보통 해적선 같은 큰 블록은 아빠가 같이 만들어 주는데 현수는 혼자 해야만 했다.     


현수는 혼자서 비슷비슷한 해적선의 갑판 블록들을 모아서 짝을 맞추는 데만 30분쯤 허비했을 때다.

방안을 한가득 메울 만큼 큰 한숨이 현수의 조그마한 몸에서 절로 나왔다.          



      

‘아빠랑 블록을 같이 만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빠는 날 왜 두고 갔을까?

할머니는 정말 아빠랑 연락도 안 하는 걸까?’       



        

생각이 커지니 현수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다. 

그마저도 솔직한 속내는 아니고 애꿎은 블록 블록을 탓을 하는 것이었다.    



           

현수: 황토색 갑판 블록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불쑥 손이 튀어나오며) 자! 여기. 

니가 찾던 거.” 

         

현수: 어, 고마... 

(목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헉!      




쿵!

현수가 기절했다.


블록을 만들던 방에는 현수 혼자 있었으니 갑자기 블록을 찾아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블록을 찾아서 내민 것은 바로 현수와 비슷한 또래의 귀신이었다.

     

사실 현수만 놀란 건 아니었다. 

귀신 아이도 놀랐다.


보통은 귀신 아이가 살아있는 아이들에게 말을 걸고 물건을 건네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런데 현수는 달랐다.     

그사이 ‘쿵!’하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홍여사가 현수는 발견했다.  



             

홍여사: 으아악!!  



             

눈이 회까닥 뒤집혀 흰자만 보이며 기절한 현수와 귀신 아이를 보고 대쪽 같던 홍판덕 여사도 온 동네가 떠나가게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귀신 아이도 홍여사의 비명을 듣고 놀라서 소리를 지르다 실신했다.     

놀라서 현수네로 몰려온 무당촌네들과 이들이 모시던 신들이 한데 얽혔다.

사람은 사람대로 귀신은 귀신대로 두 아이를 추스르기 바빴다.     


그날 이후로 현수는 혼자일 때면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 어떤 소리가 들려도 놀라지 않을 수 있도록! 

하지만 그러고도 귀신들 때문에 몇 번을 기절했다. 사건은 이러했다.      



         

홍여사: 수야~ 현수야! 

빨리 나온나. 학교 지각하겠다!   

  

현수: 네! 할머니! 

아씨... 내 파란 양말 한 짝이 어디로 갔지?    

      

“여기!”      

    

현수: 아! 고마ㅇ..   



            

쿵. 

또 귀신이었고 현수는 또 기절했다.


착한 귀신들 뿐이었지만... 

혼자 있는 방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리는 건 적응 할 수 없었다.      


현수는 그냥 귀신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무당 기질은 없었다.


귀신들은 대부분 어린 귀신이었는데 현수가 도움이 필요해 보일 때 도와주려던 것뿐이다.      

홍판덕 여사도 판산동 무당들도 그들이 모시는 신도 현수가 이런 이유를 찾지 못했다.

부산에 있는 홍여사의 신할머니는 말을 아꼈다.     


귀신을 보는 것보다 큰 문제는 기절할 때마다 현수가 머리부터 쓰려진다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하나뿐인 손자의 뇌가 잘못되는 건 아닌가 하는 홍여사의 걱정에 현수는 큰 병원마다 다니며 별의별 검사를 다 받았다.   

   

다행히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결국 현수네는 예방책으로 1층뿐인 한옥인데도 불구하고 온 집에 폭신한 유아용 매트를 깔았다.    




                

#3    

 

다행스러운 건 현수가 혼자 있을 때만 귀신을 본다는 것이다.

현수는 꾀를 내어 최대한 혼자 있지 않아야겠단 생각을 했다.


현수의 이 생각은 좋은 아이디어 정도가 아니라 지금의 끈끈한 판산동이 있게 만든 주춧돌이 되었다.      

현수네 동네가 귀신이 많은 무당 집성촌이라 서로 간의 배려는 있었으나 무당들이 넘치니 경쟁이라면 경쟁이 일어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부* 친구인 자훈이뿐이었지만, 

사교성이 좋은 자훈이를 따라 옆반친구도 사귀고 축구하다가 친해진 친구네에 가서 짜장면도 얻어먹으며 온 동네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다.


혼자 있지 않으려고 일부터 학원도 여러개 다녀서 현수의 성적도 쑥 올랐다.      

덕분에 현수는 지금의 ‘판무자’ 단톡방 멤버들을 얻을 수 있었다.      


현수가 저녁까지 친구네에서 먹고 오는 밤이면 늘 홍여사는 손자와 함께 안방에서 잠이 들었다.


홍여사는 온동네방네 돌아다니며 현수를 봐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다니게 되었고, 집집마다 먹거리부터 선물을 돌리게 되었다.      

덕분에 홍여사는 동네 아이들로부터 ‘산타 무당 할머니’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홍여사는 현수가 보는 귀신이 피부가 새하얗게 질리거나 입술이 까만 악귀가 아니니 다행이라고 말해줬다.      

홍여사가 모시는 신들도 나섰다. 

현수를 위해 귀신들 간의 스케쥴을 조정해 줬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옆옆집 신: 현수네가 오늘은 자훈이랑 학원가지?     


현수네 신: 응 ~ 월수금은 산수, 영어, 컴퓨터 학원이고 화목은 피아노, 미술이니깐... 

가만있어 보자~ 보자~

자훈이랑 오늘은 피아노 갔다가 미술 갔다가...

별일 없으면 아마 축구까지 하고 저녁 먹고 밤에 집에 올 거야.     


옆옆집 신: 어휴, 그러면 맘 편히 좀 돌아다녀도 되겠네~   

  

현수네 신: 매번 미안해.         



      

현수 입장에서는 귀신을 보고 놀라는 거지만,

귀신들 입장에서는 아무렇게나 떠들고 활보하던 동네에서 현수가 모든 걸 보고 들을 수도 있게 됐으니...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거기다 매번 기절까지 하니 완전 악역이 따로 없었다.     

귀신들에게는 약간 현수가 음성 녹음까지 되는 최신형 CCTV나 블랙박스 같았다.     


귀신들을 위해서도 현수를 위해서도 

동네 사람들은 현수가 최대한 혼자 있게 두지 않았다. 


왜?     

착한 귀신들과 무당이 모시는 신들은 서로 조심하려고 노력했지만, 

세상에는 나쁜 귀신도 있고 악귀도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도 나쁜 사람이 있고 어딜 가나 빌런은 존재하니 사람이 죽어서 되는 귀신도 매한가지일 수밖에!          

현수는 그렇게 판산동 모두의 아들이자 손자처럼 그렇게 마음이 쓰이는 아이가 됐다. 

그렇다고 어린 현수의 고민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4     


현수: 자훈아! 

귀신을 보고도 기절하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자훈: 음! 

대학 가면 알 수 있지 않을까?     


현수: 그럼, 앞으로 9년은 더...     


자훈: (말꼬리를 돌리며) 어? 어! 

현수야! 

새로 생긴 떡볶이집 갈래? 내가 살게.  

   

현수: 그래... 좋아!  



             

신이 난 자훈이를 따라 현수는 15분쯤 뛰듯이 걸어갔다.

그곳에서 현수는 떡볶이집 대신 난생처음 보는 새로 생긴 ‘만월 도서관’을 마주하게 됐다.     



          

현수: 야! 방자훈. 

이게 어떻게 떡볶이집이야!    

 

자훈: 바보야! 

여기 지하 매점에서 파는 떡볶이 진짜 맛있다고! 

지난주에 태권도 학원 누나 따라왔다가 먹어봤다고! 

    

현수: 진짜야?     


자훈: 진짜지! (가슴을 툭 치며)

너 내가 먹는 걸로는 장난치는 거 봤냐?            



   

현수는 납작한 가슴을 욱하고 치면서 어른인 척하는 자훈이 때문에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현수: 하하. 알았어. 

그런데 이상해! 도서관에서 떡볶이라니.     


자훈: 어! 크크. 

만월 도서관 생긴 지 얼마 안 돼서 몰랐을 수도~

그치만 매점의 꽃분 아줌마의 떡볶이는 진짜 맛있다고~

가자~   

  

현수: 그래!          




          

#5     


현수와 자훈이는 촐랑거리며 새로 생긴 도서관의 매점이 있는 지하로 직행했다.


초등학생도 몇몇 있고, 교복을 입은 누나나 형들이 대부분이었다.      

판산동 인근에는 고등학교 2개, 중학교 3개, 초등학교 2개가 몰려있었다. 


그러니 새로 생긴 동네 만월 도서관은 규모가 컸다.

도서관 매점도 어지간한 백반집보다 컸다. 

메뉴도 싸고 맛있었다.  



             

자훈: 현수야, 저쪽에 가서 먼저 가서 자리 잡아.  

   

현수: 어어. 알았어.         



      

자훈이가 매점 카운터 앞에 줄을 서기 위해서 달려가며 말했다. 현수는 재빨리 자리를 잡고 앉아서 가방부터 벗었다.      


사실 이날은 현수가 난생 처음 도서관에 가본 날이었다.


만월 도서관이 동네에 처음 생기기도 했지만, 홍여사는 돈을 잘버는 무당이었고 그만큼 바빴다.      

홍여사는 손주 학원 보낼 생각은 해보셨어도 함께 책을 볼 시간은 없는 분이었다. 


바쁜 홍여사의 점집 도우미 이모들이 돌아가며 식사와 청소, 또 현수를 봐주셨다. 

하지만 함께 책을 읽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런 현수에게 도서관이란 곳의 첫인상이 떡볶이라니! 

초등학생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을 만했다.     

 

만월 도서관!

도서관도 도서관의 매점도 처음인 현수는 티가 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급수대를 발견하곤 물 두 잔을 가져와서 앉았다. 현수는 이내 혼잣말을 하며 다시 일어섰다.                



“단무지는 셀프네?”            



   

현수는 주방 입구 옆에 있는 ‘단무지는 셀프’ 푯말 앞으로 향했다.


단무지 코너 앞으로 간 현수는 바로 옆 매점 배식구에서 까만 선글라스 끼고 연신 떡볶이를 뒤적거리며 생글생글 웃는 주방 아줌마를 보게 되었다.     


그녀는 총천연색의 꽃무늬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빨간 앞치마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 새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웃으며 손님을 맞이한다니! 어렸던 현수 눈에도 그건 정말 이상했다.


어쨌든 옷을 보니 자훈이가 말한 꽃분 아줌마인가 보다.     


현수는 단무지를 뜨려다 말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아줌마를 한 번 더 쳐다봤다. 

문득 작년에 할머니가 했던 쌍꺼풀 수술이 떠올랐다.    




                 

#6     


할머니는 나이가 드니 계속해서 눈꺼풀이 처지고 눈이 잘 안 떠진다고 푸념하셨다. 

그러다 크나큰 결심을 했다시며 쌍꺼풀 수술을 감행했다.     


홍판덕 여사는, 쌍꺼풀 수술은 수술이고 무당일은 무당일이라며 한동안 새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일을 보셨다. 

송충이처럼 두꺼워진 쌍꺼풀과 보라색, 초록색, 노란색으로 물든 눈두덩이를 가리기 위해서는 선글라스만 한 게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할머니 눈의 부기가 빠지고 멍이 가셨다. 

현수 눈에는 그다지?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판산동 할머니들과 아줌마들 눈엔 아니었나 보다.   

        

‘홍판덕 여사의 눈이 예전보다 두 배쯤 커졌다’는 둥, ‘아줌마로 보일 정도로 젊어지셨다’는 둥 난리가 났다.           

중년의 무당촌 여자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할머니가 수술했던 성형외과에서 쌍꺼풀 수술을 했다. 단체로 할인도 받으셨고! 

그래서 한동안 판산동에 점을 보러 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까만 선글라스 낀 무당이 사는 동네라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새까만 선글라스를 낀 열댓 명의 무당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시장에서 장을 볼 때면 다들 멋있다고 난리였다.      


‘드라마 찍는 것에요?’ 하면서 구경꾼이 몰려들기도 했다고 한다.    




                

#7     


‘우리 동네 쌍꺼풀 유행은 작년이었는데... 

도서관 매점 아줌마는 좀 늦게 하신 걸까?’       



         

이런 생각을 하며 현수는 단무지를 푸다가 꽃분 아줌마와 눈이 마주쳤다.     


음? 

선글라스 렌즈가 너무 까매서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어째선지 현수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현수도 모르게 꽃분 아줌마에게 말이 튀어나왔다.      



         

현수: 아줌마! 아줌마가 꽃분 아줌마죠? 

근데요... 쌍꺼풀 수술했어요?

우리 할머니도 작년에 했을 때 그런 선글라스를 쓰셨거든요! 

아프진 않으세요?         



      

순간 아줌마 얼굴의 웃음기가 싹 사라지셨다. 


아뿔싸...! 

현수 머릿속에 ‘할머니가 여자한테 성형 수술했는지 묻는 거 아니라고 했는데...’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까만 선글라스를 쓱 머리 위로 쓸어 올렸다. 

갑자기 피부가 허옇게 질리면서 눈가와 입술이 새까맣게 변했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다.       



        

“네 놈, 내가 어찌 보이는 게냐!”  

   

“악ㄱ...!”        



       

털썩. 

현수는 또 기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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