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수: 아, 신 할머니가요?
(체념한 기분을 숨기며) 음...
좋은 소식이라니 기분 좋네요.
현수는 애써 밝게 예의를 차려 대답했다. 오늘 본 사서 모집 공고가 0이었기 때문이다.
홍 여사가 민현수의 앞길을 보질 못하니. 이제는 쉬셔야 할 나이의 신 할머니가 좋은 일이 있을 때, 조심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종종 연락을 주셨다.
하지만 마냥 믿기는 어려웠다. 신 할머니의 점괘가 특이했다.
너무 먼 미래를 봐주시거나 당장 그날 거의 1분 후에 일어날 일을 알려주시는 등등...
틀리지는 않았지만
타이밍이 애매했다.
신 할머니의 점괘는 지나고 보면 맞지만, 그 타이밍이 애매하니 대비했다 가도 까먹거나 대비하기도 전에 사고를 겪곤 했었다.
현수는 옛날 일을 떠올렸다.
#2
현수가 어릴 때였다.
신 할머니가 대뜸 홍 여사에게 전화해서 이렇게 말하셨던 적이 있다.
신 할머니: 우리 수야(현수) 는 술을 조심해야 한다.
홍 여사: 수야가 이제 6살인데예?
신 할머니: 아! 맞네.
그래도 술을 조심해야 한다!
홍 여사: 예. 예.
그렇게 홍 여사는 신 할머니와의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사람들이 있는 중정으로 향했다.
당시는 무당촌네들이 모여서 여름 기분을 내려 홍 여사의 중정에 다같이 모여 있었다.
중정 한가운데에 커다란 대야를 놓고 수박, 참외, 막걸리 병, 정종병 등을 얼음과 함께 담가 놨었다.
어린 현수도 자훈이도 그 옆 수돗가에서 서로 물을 뿌리며 잘 놀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은 채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더운 한 여름의 낮이었다.
자훈이랑 잘 놀던 현수는 멀리서 할머니가 전화 통화를 끝내고 중정으로 들어오는 걸 보고 반가운 마음에 냅다 뛰어갔다.
현수 몸에서 떨어진 물들이 중정의 돌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만 현수가 바닥에 떨어진 물 때문에 쭐떡하고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것도 커다란 대야에 있던 정종병에 정통으로 머리로 들이박으면 말이다.
‘딱!’ 하는 소리를 내며
현수의 몸은 대야 안으로 대짜로 고꾸라졌다. 반나절쯤 후 현수는 병원에서 정신을 차렸다.
증상은 가벼운 뇌진탕이었지만 현수가 너무 놀라서 기절한 것이었다.
하필 정종병 쪽으로 고꾸라질 게 뭐람?
아무튼 현수 신 할머니의 점괘는 그랬다.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그런 것이었다.
#3
“딩동~ 딩동”
옛 생각에 빠졌던 현수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통화 중이던 할머니에게 말했다.
현수: 할머니! 뭐가 왔나 봐요.
다시 전화할게요.
홍 여사: 오이야.
민현수는 인터폰 쪽으로 향했다. 인터폰 화면에 비친 건 판산동을 전담 우체부 아저씨였다.
인터폰의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현수: (밝은 톤으로) 네, 아저씨.
우체부: (반가운 듯) 어~ 현수야,
네 앞으로 엽서가 왔어.
현수: 엽서요?
이 시간에요?
우체부: 그러게. 흐흐
현수: 잠시만요.
현수는 빠른 걸음으로 다시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에서 건강 음료 한방을 꺼내 들었다.
안채에서 슬리퍼를 신고 나온 현수는 빠르게 중정과 본채를 지나 현관문이 있는 바깥채까지 달리듯이 걸었다.
현수가 이렇게 달리듯이 우편물을 받으러 가는 이유하는 하나다. 안채에서 현관까지가 집 치고는 멀기 때문이다.
홍판덕 여사와 현수가 살고 있는 이 한옥은 오래된 한옥의 특성을 모두 유지한 채 내부만 리모델링을 한 집이다.
#4
홍판덕 여사가 이 집을 산 건 급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점집과 살집을 동시에 두기에 최적화된 집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집은 바깥채, 본채, 안채, 중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인터폰은 안채용, 바깥채용 두 개다.
안채용 뒷문도 따로 있지만 거긴 홍 여사만 쓰는 문이다.
현수네의 바깥채는 접수 안내를 하는 도우미 이모님들이 계시다. 기다리는 손님을 안내하고 차와 커피를 사 마실 수 있는 작은 공간을 관리하신다.
오늘은 도우미 이모님들도 할머니와 다 같이 자훈이네 콘서트를 가셨다.
군대로 치면 현수네서 일하는 도우미 이모들은 거의 땡 보직이라 할만했다.
할머니는 주 5일 영업했지만, 일정 따라 주 4일 근무일 때도 많았다.
덕분에!
도우미 이모들은 장기 근속자였다. 일을 허투루 하는 분도 없는 꿈의 직장이랄까? 이모들은 할머니가 영업하지 않아도 주 5일 출근하셨다.
이유는 이랬다.
좋은 곳에서 좋은 대우 받고 일을 하니 이모들이 내리는 커피 맛과 차 맛이 좋았다. 점을 보러 오시는 분들도 늘 신선한 원두와 차를 사 마시며 대기할 수 있어서 좋아했다.
동네 사람들은 할머니에게 점사를 보지 않더라도 커피와 차를 마시러 오곤 했다. 그런데 바깥채는 점집이 메인이라 대기 손님이 많으면 동네 분들에게 내드릴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벽에 외부용 창을 내어 테이크아웃으로 팔았다.
홍 여사가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팻말을 달아두고 ‘판산 다방’이라고 하며 이모들이 장사했다. 동네 장사니 돈 벌이용은 아니었다.
쉬는 날 커피와 차를 판 돈은 모아 도우미 이모들은 민현수의 이름으로 보육원 간식을 기부했다.
본채에는 점사를 보는 곳이었다.
할머니가 예를 올리는 법당, 치성을 드리는 방, 점사를 보는 방이 있었다.
다른 방들은 여느 무당집과 비슷했지만, 점사를 보는 방은 달랐다. 아이돌 가수들의 녹음실처럼 방음 시절이 갖춰져 있어서 매우 고요했다.
그렇다고 삭막하진 않았다.
판타지 세상에 들어온 것처럼 할머니 등 뒤로는 직접 키운 온갖 야생화와 풀들이 마치 병풍처럼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좌청룡 우백호처럼
한쪽 벽에는 할머니가 모시는 신들을 기리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다른 벽은 할머니의 손때 묻은 재봉틀과 고운 저고리들을 디스플레이 하는 공간이었다.
할머니는 다른 건 몰라도 저고리만은 손수 지어서 입으셨다.
은은한 미색의 각양각색의 원단으로 만든 범상치 않은 저고리가 벽을 가득 메우곤 했다.
은사가 놓인 실크에 스팽글을 알알이 밖은 저고리,
샤* 브랜드에서 쓰는 최고급 트위드로 만든 저고리,
이탈리아산 양가죽으로 만든 저고리까지.
점사 방에 들어온 이들은 이 풍광에 재벌 총수들이라도 넋을 잃곤 했다.
탁 트인 중정은 잔디와 텃밭이 어우러져 있다.
위를 보면 오롯이 하늘만 보이는 서울답지 않은 곳이었다. 이런 중정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 안채였다.
안채는 주거 공간이 이다.
내부 리모델링한 한옥으로 현수와 홍판덕 여사가 보통 사람처럼 생활하는 무던하고 차분한 공간이다.
#5
뛰듯이 걸음을 재촉한 현수가 낚아채듯이 바깥채의 현관문을 열었다.
안채에 바로 딸린 뒷문은 홍판덕 여사만이 쓰는 귀문이어서 아무도 쓰질 않았다.
현수: 아저씨~
우체부: 어. 현수야!
자~ 여기 네 앞으로 온 엽서.
현수: 네, 감사합니다.
(음료를 건네며) 아저씨 이거 드세요.
조심해서 가세요~
우체부: 어 그래.
항상 고마워.
우체부 아저씨와 헤어진 현수는 아까와는 달리 느릿하게 움직였다. 흐느적거리며 안채로 향하면서 엽서를 유심히 봤다.
엽서는 흐릿한 바다나 하늘 같은 색이었으나 어떤 이미지인지 쉽게 알아볼 수는 없었다.
현수는 엽서를 가까이서도 보고 멀리도 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뭐지?
뭔가 푸르르긴 한데.
그림도 아니고, 아주 흐릿하네.
확대한 건가? 픽셀 깨진 걸로 보는데...
음~”
그러면서 현수는 엽서의 뒷면을 보았다.
무척이나 잘 쓴 정자체로 단어들만 의미심장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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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만월
기억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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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헙!’
호흡이 턱하고 가빠진 민현수는 잠시 벽을 짚고 섰다.
엽서에 적힌 단어들이 현수를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이내 주저앉은 현수는 이상한 혼잣말을 했다.
“안돼. 안돼!
4들멈8내, 4들멈8내...”
현수가 과호흡이 올 때면 진정시키는 방법이었다. 4초간 숨을 들이마시고 멈췄다가 8초간 숨을 내쉬는 걸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힘들면,
현수는 가슴에 손을 얹고 손톱으로 손등을 가볍게 뜯었다.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잠시 후 진정이 된 현수는 우체부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수: 여보세요? 아저씨...
엽서를 처음 받아봐서 그러는데요.
보낸 사람 주소가 없어서요.
우체부: 아~
보통 엽서는 받는 사람 주소만 써도 그냥 보내줘.
현수: 그래요?
이런 걸 보낼 사람이 없는데 왔길래요.
우체부: 요즘 엽서 보내주는 이벤트를 국내나 해외 여행지에서 종종 해.
여행 간 친구 중에 누가 보내지 않았을까?
현수: 네!
감사합니다. 아저씨.
우체부: 어, 그래~
현수: (혼잣말로) 이 비밀을 아는 친구는 없어요. 아저씨...
꺼림칙한 기분이 든 현수는 판무자 단톡방과 대학 동창들의 *스타를 살펴봤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여행 가서 자신에게 엽서를 보낼만한 곰살맞은 친구는 떠오르지 않았다.
대학 동창들은 거의 지금 현수와 마찬가지로 취업에 목을 매고 있다.
그래서 어딜 여행 가고 엽서를 보낼 만큼 심적으로 여유 있는 이들이 없었다.
판무자 방의 친구들은 찐하고 깊게 친하다.
하지만 남자들끼리 엽서 같은 건 보내지도 않을 뿐더러, 판무자 방의 여사친들도 여행 선물을 사 오면 사 왔지 엽서를 보낼 이들은 아니었다.
‘신 할머니가 말한 좋은 소식이 설마 이걸까?
이게 어떻게 내게 좋을 일일 수가 있지?’
찜찜한 기분의 현수는 신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6
“니 받았제?”
신호음이 1번 울리마 마자 신 할머니가 내뱉은 말이었다.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이다.
현수: 네, 신할머니. 잘 지내시죠?
방금 집으로 온 엽서를 한 장 받았어요.
신 할머니: 종종 갈끼다.
느그 할매가 너는 평범하게 취직하고 살라고 매일 치성드린 보답이라 생각해라.
그라믄 된다.
뚝! 신 할머니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신 할머니는 답다.
딱 필요한 말만 할 뿐 자세하게 혹은 자상하게 설명해 주시는 분이 아니다.
어쨌든 신 할머니의 말은 정종병에 머리를 정통으로 맞으며 기절했던 6살 시절부터 늘 옳았다.
타이밍이 안 맞을 뿐 틀린 말씀하셨던 적은 없었다.
엽서는 처음이지만...
현수는 혼자 생각하기를 멈추고 연락을 기다릴 것 같은 할머니, 홍판덕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 신호가 울리자마자 홍판덕 여사가 전화를 받았다.
홍 여사: 수야가? 우리 현수 와?
좋은 소식이 벌써 왔나?
현수: 어... 그게 엽서가 한 장 왔어요.
이게 좋은 소식인지 알 수 없어서 신 할머니한테 전화를 드렸어요.
홍 여사: 그래?
느그 신 할머니가 뭐라 시드노?
현수: 그냥 그 엽서에 적힌 대로 하면 다 잘될 거라고 했어요.
홍 여사: 별다른 말은 없으셨고?”
현수: 네, 더 이상은 말씀 못 하신다고...(말꼬리를 흐리며 목소리가 작아짐)
홍 여사: 엽서에 뭐라고 하드나?”
현수: 귀신, 만월, 기억, 사서.
이렇게 네 단어만 쓰여 있었어요.
홍 여사: (구시렁거리듯이) 참 내...
아한테 갈카줄라고 제대로 해주지 만다고 스무고개를 내노...
(이내 분위기 전환하듯 밝게) 수야, 현수야.
오늘이 만월이니깐!
함 있어봐라.
쪼매 이상한 것 같긴 해도~
느그 신 할머니가 틀린 말 하는 사람은 아이다 아이가?
꽃분 이모도 보는 날이니깐.
잘 물어봐라.
현수: 네, 할머니.
할머니는 콘서트 잘 보고 제주도 여행만 신경 쓰세요.
신 할머니가 좋은 소식이라고 했으니...
좋은 일이겠죠. 모!
홍 여사: 그래 그래.
니 말이 맞다!
무당촌네들: (여럿이 급한 목소리로) 현수네야.
빨리 온나.
콘서트 시작한단다.
현수: 할머니, 얼른 들어가 보세요.
자훈이 콘서트 놓치면 안 되잖아요.
홍 여사: 오이야. 알았다.
아무 생각도 걱정도 말고 있어라.
생각 많이 해봐야 머리만 아프다.
알았제?
곧 다 알게 된다! 만월이다.
아이가?”
무당촌네들: (여럿이 더 다급한 목소리로) 현수네야! 니 뭐하노!
홍 여사: (대꾸하며) 아이고 간다. 가!
현수야, 할미 드르가야겠다.
난리다 마!
현수: 네, 할머니.
홍 여사: 오이야.
아무 생각 말그레이!
할머니와 그렇게 통화했지만,
엽서를 받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몸을 사린 지가 벌써 10년이 넘었다.
그때 그 사건과 도서관 분들이 아니었다면?
현수는 아직도 귀신을 보고 들으며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살고 있었을 것이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 시작된 그 비밀로 현수는 핸드폰 배터리 강박과 과호흡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렇다.
비밀은 현수의 트라우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