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고 싶은 어처구니없는 이유

동료와의 점심, 일하는 나에 도취, 신나는 일 얘기

by 깨알쟁이

퇴사한 지 200일이 지났다. 7개월이 지났다는 이야기를 낭만적으로 표현해 본다. 6개월 안에는 다시 일터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순식간에 한 달이 더 지나가버리니 개월수보다는 n일로 표현하기로 마음먹었다.

한동안은 돈 버는 것 말고는 회사에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던 내가 최근 어처구니없는 이유들로 출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첫 번째로는 남편처럼 동료들과 점심을 함께 먹고 싶다. 집에서 조용하게 혼자 먹는 점심도 좋지만 가끔은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랑 회사 얘기 하면서 점심 먹고 싶다. 다 같이 점심 먹으러 나와서 '오늘은 뭐 먹을까요?'라며 의미 없는 고민을 나누고, 정처 없이 발길이 닿는 곳으로 향하고 싶다. 혼자 냉장고 문을 열고 '아 오늘 점심은 또 뭘 털어볼까?'라는 생각 대신 '어디로 향할까요?'라고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점심시간을 보내고 싶다. 혼자서는 잘 먹지 않는 점심 메뉴인 순댓국, 뼈해장국, 설렁탕을 동료들과 더치페이하며 먹고 싶다.


두 번째로는 '일하는 나'라는 멋진 나 자신에 도취되고 싶다. 마케팅을 업으로 삼으면서 나는 밖에 나가면 주목받고 반짝여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사무실 안에서는 엑셀 앞에서 고뇌하던 시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 시간조차 그리울 때가 있다. 엑셀 앞에 앉아 숫자놀음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답답함에 천불이 나는데, 내 자리를 지나가는 다른 부서 사람들이 '우와, 차장님 이런 일을 하시는군요. 어렵겠어요.'라고 말할 때 스스로에게 흠뻑 취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괴로운데 그 괴로움을 아름답게 봐주는 동료들 덕분이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괴로움을 다시 갈망하고 고뇌하는 나 자신, 열심히 일하는 나에게 빠져보고 싶다.


세 번째로는 신명 나게 일 얘기 하고 싶다. 나는 사실 일, 소통을 되게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소개로 만난 외주 디자이너 한 분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안광이 이렇게 반짝이는 분 처음 봐요. 과장님은 정말 일을 좋아하나 봐요. 일 얘기할 때 눈에서 빛이 나요." 이제까지 살면서 나에게 눈동자가 반짝거린다는 칭찬을 해준 건 아빠, 엄마 그리고 전전회사 전무님 한 분이셨는데, 다 그냥 해주시는 칭찬이라고만 생각했지 진심일 줄은 몰랐다. 아마도 오글거리는 멘트여서 그랬겠지. 근데 또래 디자이너분께서 그런 말을 해주니 다르게 느껴졌다.

'내가 진짜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지독히도 사랑해서 혼자 괴롭고 혼자 즐거워하다가 또 놓지 못하고 잠시 쉬는 것 같다가도 다시 일어나야 하는 사람이었구나.'

직무 특성상 회사에서 모든 사람들과 소통해야 하는 일도 나에게는 버틸만했던 것이 이 때문이었다. 깊지는 않지만 회계, 물류, 디자인, 온라인 영업, 오프라인 영업, 프랜차이즈 매장 직원분들까지 모두 나의 대화 상대였다. 그들의 일을 궁금해하고 진솔하게 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어떻게 일을 일이 되게 할까, 그들의 고충은 무엇일까, 그들의 일과 나의 일의 연관성은 어느 정도일까, 어떻게 하면 최소한으로 부딪히면서 일을 처리할 수 있을까.'

내 입장이 아니고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춰 다가가니 다각도에서 현장의 소리를 수집할 수 있었다. 실제로 물류센터에서 일하시던 사우 님들과 믹스 커피를 나눠먹으며 나눈 수다들은 제품의 클레임이 들어왔을 때 지혜롭게 고객 입장을 이해할 수 있던 기회로 다가왔다. 지위나 명성이 높은 사람이든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든 구분하지 않고 다양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나눈 시간들은 여전히 나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일터에 나갈 수는 있을지, 일터에 다시 나가게 된다면 어떤 동료들을 다시 만나게 될지 상상할 수 없지만 신나게 일 얘기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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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좋은 동료와 함께 재밌게 일하는 것이 꿈이던 나에게 위의 세 가지는 갖기 힘든 사치가 되어버렸지만, 다시 올 날을 꿈꾸며 나는 오늘도 나의 자리에서 주어진 일을 수행해 봐야겠다. 우선은 현재 나의 유일한 동료인 나와 시간을 잘 보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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