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목소리가 너무 커서, 아이의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by 정상가치

우리는 종종 ‘조삼모사(朝三暮四)’를 상대를 현혹하는 얕은꾀로 기억합니다. 아침에 도토리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겠다는 말에 화내던 원숭이들이 아침 네 개, 저녁 세 개라는 말에는 기뻐했다는 우화. 그들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이야기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강경희 교수의 『어른을 위한 고전의 숲』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죠.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이 처음에 제안했던 방식은 그가 판단하기에 최선이었다. 나름 원숭이를 배려해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원숭이들은 그 제안에 화를 냈다. 그때 사육사는 자신의 제안이 원숭이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며 굳이 설명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제안이 원숭이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곧바로 자신의 판단을 내려놓고 새로운 제안을 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원숭이들이 기뻐했다. 상대가 원하는 것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어른을 위한 고전의 숲>, 강경희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아이를 향한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얼마나 많은 '최선'을 강요했던가요. 집에 오면 손부터 씻어라, 숙제부터 끝내라. 모두 아이가 바른 어른으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배려'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잔소리 좀 그만하세요!"라며 화를 냈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른답지 못하게 감정이 앞서 언성을 높이고는, 이내 후회하곤 했습니다.


장자가 『장자』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사육사의 태도는 바로 ‘내려놓음’이었습니다.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설득하는 대신, 그 판단 자체를 내려놓고 상대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지혜.


사춘기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열병이 아닙니다. 오은영 박사의 말처럼 "육아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녀의 독립"을 향한 첫걸음입니다. 부모라는 슈퍼 히어로의 품을 떠나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시기. 이때 아이에게는 부모의 논리적인 조언보다 친구와의 공감대가 더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먼 미래보다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이미지 033.png



이는 교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각하는 아이,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 그저 '학생이니까'라는 틀에 맞춰 같은 말을 반복했지만 아이들은 좀처럼 변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강경희 교수는 말합니다. "자기 안에서 나오는 소리를 닫고 상대의 소리를 들을 준비를 해야 한다."


어쩌면 제 목소리가 너무 커서 아이들의 작은 속삭임을 듣지 못했던 건 아닐까요. "왜 늦었어?"라는 다그침은 진정한 물음이 아니었습니다. 답이 정해진 질문 대신, 아이의 마음을 열게 하는 '발문(發問)'이 필요합니다. 아이 스스로도 몰랐을 그 마음의 이유를, 함께 찾아 나서는 과정 말입니다.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은 아이 스스로가 가장 클 겁니다. 다만 혼란 속에서 방향을 잃었을 뿐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아이가 말 못 할 고민을 품고 있지는 않은지, 먼저 물어봐 주어야 합니다. 설명하고 설득하려 하기 전에, 판단의 잣대를 거두고 아이의 이야기에 온전히 귀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조삼모사’의 사육사처럼 내 안의 소리를 잠시 끄고 아이의 세상에 접속해보려 합니다.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변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침묵 속에서 비로소 들려오는 진심이 분명 있을 테니까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글쓰기의 본질을 깨달은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