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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차는 달려가고 Aug 25. 2021

화려한 도시의 뒷전에서

활자로 만난 인물들

[방랑기, 상. 하권], 하야시 후미코 지음,  최연 옮김, 소화,



출생부터 바닥이거나,

중간에 바닥으로 떨어졌거나.

일단 바닥에 한번 놓이면 치고 올라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앞을 알 수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고달픔.

그래서 다들 반석 위에 놓인 탄탄한 집을 기원하지.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 생계가 보장되고, 정년까지 자리가 확보되고, 죽을 때까지 궁핍하지 않게 먹고살 수 있는 그런 안전함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출렁거리고 때로는 어마어마한 파도가 모든 것을 휩쓸어가기에.

사람의 짧은 머리로 앞날을 예견하기는 어렵다.



1904년 출생한 일본 작가 하야시 후미코는 태생부터 불안정한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여러 자식이 있는 혼인 중에 연하의 가게 종업원에게서 아이를 갖게 되었다.

남편과 자식들을 두고 집을 나와 혼외자인 후미코를 낳았는데 아이 아버지는 자식을 인정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자식뻘인 또 다른 남자와 어린 후미코를 데리고 규슈 지역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살아가게 된다.

어색한 가족 구성원, 싸구려 여인숙을 떠도는 하루살이 장사꾼. 


초등학교를 다니다 말고 과자공장에서 일당을 받으며 노동을 하고.

나중에 여학교에 진학해서 선생님들로부터 글쓰기 재능을 인정은 받았으나...

남자를 따라 도쿄로 왔는데 얼마 안 가 혼자 남게 되고.

야시장 좌판, 가정부, 사환 같은 허드렛일로 연명하다가 카페 여급도 한다.

남자와도 살고, 등 돌린 남자를 찾아다니기도 하고.

며칠씩 굶으면서 전당포와 외상과 한 평짜리 월세방 또는 여급 숙소를 전전했.

던보이와 모던걸, 화려한 긴자 거리를 소요하던 다이쇼 시대의 도쿄에서.


그래도 틈틈이 책을 읽고 일기와 글을 쓰면서 작가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1930년, 도쿄의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쓴 일기 [방랑기]로 문단에 등단한다.



소설은 처절한 생존의 기록이다.

때가 되면 위장은 아우성을 치니 배를 채우는 것이 급선무다.


얼마 안 되어 나는 초등학교에 가는 대신에, 스자키 마을의 좁쌀 과자공장에 일당 23전을 받고 다녔다. 그 무렵, 소쿠리를 들고 사러 다닌 쌀이 18전이었던 것으로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  

그런 이야기에서 무엇을 배웠던 것일까? 행복해지고 싶다는 나만의 공상과, 영웅주의와 감상주의가 해면 같은 내 머리를 적시고 말았다. 내 주위는 아침부터 밤까지 돈 이야기였다. 내 유일한 꿈은, 벼락부자가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비가 며칠씩 계속 내려서 아버지가 빌린 짐수레가 젖으면, 아침저녁으로 호박밥을 먹었기 때문에, 밥상에 앉을 때마다 정말 서글펐다.(18,19-이하 모두 상권에서 인용)


악전고투의 나날.

도쿄의 뒷골목에서 몇 년을 보냈지만 여전히 먹는 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나는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동화나 시를 서너 편 팔아도 그것 가지고 한 달 먹고살 수는 없다. 배가 고프니까 동시에 머리가 몽롱해져, 내 사상도 녹이 슬어 무디어지는 것이다. 아아 내 머리에는 프롤레타리아도 부르주아도 없다. 그저 한 줌 하얀 주먹밥이 먹고 싶을 뿐이다.

밥 좀 먹게 해 주세요.

...

저녁이 되자, 세속의 모든 것을 모아 밥그릇 딸각거리는 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려온다. 뱃속이 꼬르륵거리자, 나는 아이같이 슬퍼져서 저 멀리 밝은 유곽의 여자들이 문득 부러워졌다. 나는 지금 굶고 있다.(128,129쪽)


배고픔은 계속된다.

사흘을 굶으면 남의 집 담장을 넘는다지.

아직 추운 2월이었다.


머리 꼭대기까지 굶주려 오니 철판처럼 몸이 빵빵 울리고 있는 것 같아서 멋진 편지를 쓰고 싶다. 그러나 역시 나는 먹고 싶다. 아아 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카페의 접대부에, 여종업원 따위라니! 열 손가락에서 피가 솟을 것 같은 이 추위.

.... 아래층 사람들이 목욕탕에 간 틈새에 된장국을 몰래 훔쳐 마셨다. 신이시여 비웃어 주십시오.(357쪽)


규슈의 가난한 어머니는 도쿄의 딸에게 때때로 이런 편지를 .


비록 50전이라도 좋으니까 보내다오. 나는 류머티즘으로 고생하고 있다. 여기선 너와 네 아버지가 빨리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아버지에게서도 좋은 소식이 없고, 네 사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얘길 들으니 살아 있는 게 괴롭다. (56 쪽)



사는 게 너무 고달프다 보니 어느 남자가 나를 열흘이라도 먹여 살렸으면, 하는 탄식이 우러나기도 하지만.

배고픔을 면하면 이 처자는 금세 씩씩해진다.


나도 오늘부터 일하러 다닌다. 남자에게 얻어먹는 것은, 진흙을 씹는 것보다도 괴로운 일입니다. 번드르르한 일보다도, 내가 찾은 직업은 고깃집 급사, ‘로스구이 하나 있습니다.’ 사다리 계단을 통통 올라가자, 사무치도록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싶어 진다. 큰 방에 모인 얼굴은 모두 재미있는 필름 같다. 고기 접시를 가지고, 사다리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니, 내 전대 속도, 그만큼 조금씩 돈으로 부푼다. (71쪽)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니다.


정말 언제쯤이면, 다른 사람들처럼, 조촐한 식탁을 둘러싸고, 태평하게 밥을 먹을 수 있는 신분이 되는 걸까 생각한다. 한두 개 동전 정도로는 만족스럽게 먹을 수 없으며 카페 따위에서 일하는 건, 구질구질한 자포자기로 생활이 거칠어지고, 남자가 부양해 주는 건 처량하고, 역시 책을 팔아서는 순간순간의 임시방편밖에 안 된다.(82쪽)


아무리 씩씩하려 해도 때로는 견딜 수 없는 서글픔이 밀려든다.


모든 게 싫어져서, 2층 여급의 방구석에 쓰러져 잔다. 쥐가 떼를 지어 달려간다. 어둠이 눈에 익숙해지자, 어수선하게 보따리가 돌멩이처럼 사방에 뒹굴고 있고, 잠옷이랑 허리띠가, 해초처럼 벽에 널려 있었다. 부글부글 끓는 듯 시끌벅적한 아래층의 잡음에다가, 도깨비라도 나올 것 같이, 여급의 방은 적적하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과, 가스같이 빠지는 슬픔의 범람. 뭔가 올바른 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차분한 마음으로 책을 읽고 싶다.(105쪽)



소설에는 가난한 이웃들의 행적도 담겨있다.

여자아이들은 술집이나 사창가로 팔려가고 남자들은 고된 노동으로 죽어간다.

삶이 고달프고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사람을, 사랑을 더 갈구하기도 한다.


요시는 하얼빈의 호텔 지하실에서 태어난 것을 떨쳐 버리려, 여러 곳을 걸어온 듯하다. 아이는 한국의 어머니에게 맡기고, 새로운 남자와 도쿄로 흘러 들어와선, 언제나처럼 남자를 먹여 살리느라 카페 생활이라고 한다.(114쪽)


“난 말이야, 사랑이니, 연정이니, 당신에게 반했습니다. 평생 동안 버리지 말아 주세요. 따위의 바보 같은 일은 질색이야. 이런 세상에서 당신, 그런 약속 같은 건 아무것도 되지가 않아. 나를 이렇게 만든 남자는 말이야, 대의원인가 그랬지만, 내게 아기를 가지게 하고선 끝이야, 우리가 사생아를 가지면 그게 요즘 말하는 모던 걸이야. 잘난 낯가죽... , 바보 같은 속세 아냐? 진심 같은 건 약에 쓸래도 없어. 내가 이렇게 3년이나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건, 내 아이가 불쌍해서야....”(121쪽)


카페로 흘러들어온 여급들은 다들 사연이 있지.


살이 쪄서 모델처럼 하늘하늘한 손발을 씻고 있던 도시 씨가 느닷없이 말했다.

  “..... 내가 시집간 집은 지주였는데, 너무나 개방적이라, 내게 피아노를 배우게 해 주었어요. 피아노 교사도 도쿄에서 온 피아노 연주자. 그 녀석에게 완전히 속아서 난 아이를 가져 버렸어.(125쪽)


나는 베개 밑의, 담배를 피우며 내던진 도키 씨의 팔을 보고 있었다. 아직 17살이라 피부가 복숭아 빛이다. 어머니는 조시키에서 얼음 가게를 하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병이 있어서 이삼일 걸려 도키 씨한테 뒷문으로 돈을 가지러 왔다.(168,169쪽)


다이코 씨는 저 사람 사이에서 난 아이 유골을 갖고 이곳저곳 전전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해 버린 걸까.(334쪽)



소설에는 당시 도쿄의 풍경과 사람들의 생활이 잘 그려져 있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는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동시에 연민도 담겨 있지.

아마 징용으로 끌려갔을 광산에서 도망친 조선 노동자들도 한 자락 흔적을 남겼다.

나라를 잃은 우리 할아버지들은 이렇게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다.


가을이 되자, 별이 몇 개씩이나 떨어진다. 벌써 마을 입구다. 뒤쪽에서 “아줌마,”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떠돌이 광부가 부르는 것 같았다.... 이틀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했다. 도망쳐 왔느냐고 아버지가 물었다. 두 사람은 모두 조선인이었다. 오리오까지 가는데, 돈을 빌려달라고 몇 번이나 머리를 숙였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50전 은화를 두 개 꺼내어 하나씩 쥐어 주었다. 제방 위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망망한 조선인 두 사람의 머리 위에 별이 빛나고, 이상하게 우리들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는데, 두 사람 다 돈을 받고는, 우리 수레를 밀어주며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마을까지 따라왔다.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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