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의 단편집을 빌려왔다.
<고향>은 다시 읽어도 시들지 않는 감상이다. 고교 시절 중국 문학 방과후에서 K선생님과 함께 읽은 마지막 구절은 여전한 명품이다.
‘희망이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다. 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되는 것이다.’
문장공부로도 좋은 교재다. 나였으면 ‘가는 사람’ 앞에 ‘하지만’을 달아 과공비례의 실례로 독자의 감동을 파했을 것이니 더욱 애송해보는 구절이다.
무엇보다 이번 독서에서 얻은 최고 값어치는 <광인일기>의 발견이다. 표제작이 <고향>이 아니라 이것인 데 동감한다. 제목에선 올봄에 읽은 <광인의 수기>가 떠올랐으나 도입을 읽으니 그 러시아 대문호는 잊고 금세 떠오르는 건 국내 영화 <이끼>와 <사바하>였다. 외지인이 우연히 마을에 들리고 이곳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앞선 내지인이 남긴 기록을 발견하는 것은 미스터리 스릴러물의 흔함이겠다. 그랬으나 루쉰의 <광인일기>를 읽으니 이는 클리셰라기보다 클래식한 도입이라 부르고 싶다.
‘광인’이 숱한 창작물에서 매력적인 캐릭터인즉슨, 그의 외면보다 내면이다. 일기는 내면의 얼굴이다. 광인은 이웃이 사람을 먹는다고 의심하고, 의심은 확신으로 자라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회유하지만 극에 가선 “앞으로 식인을 하는 사람은 세상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들은 알아야 해······” 사경을 헤매는 환자의 망연자실이 되고, 처연히 과거를 돌아보니 자신도 식인을 저질렀음을···! 그러자 몰려오는 혼돈에 뚜렷이 고하는 단말마의 외침! 그런 점에서 투병일기를 읽었다.
특히 광인의 외침은 <고향>의 문장과 맞먹는 침묵을 준다. 편집증도 전염이 되는 걸까. 그 외침을 들으니 왠지 나도 광인이 되어 본다.
요즘 거리에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누가 아이들을 잡아먹었는가. 최근엔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신생아가 발견되었다. 쥐스킨트가 쓴 소설의 배경은 18c인데 21c에도 이러하던가. 버스 안은 이미 초고령화 사회다. 아니 식인 사회인가.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 누군가 출산의 영혼을 잡아먹고 있다. 학생을 식인하고 있다. 죄책감을 덜기 위해 ‘자살’이라 보고할 뿐이다.
중년의 수학 강사는 말했다. 너희는 어른이 하는 말은 듣지 마라. 한국의 불행 지수를 아느냐. 불행한 자들이 하는 말이니 따르지 마라. 그 강사는 분명 광인이었다.
이 나라 새 어른이 될 우리부턴 식인의 역사를 멈추어야 한다. 출산의 영혼을 살리고 유아를 잡지 않으며 학생을 옥상에 올리지 말아야 한다. 광인이 범인(凡人)이어야 한다. 광인의 외침을 내 안에 고하니.
아이들을 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