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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가는 날!

by 빛나는 윤별경



1979년 12월 31일.

우리 식구들은 대구외갓집에

도착하였다.

내일 새벽 라북도 진안으로

출발하여야 했다.

큰언니가 시집가는 날이었다.


내일이면 20살 되는 큰언니이다.

동네 근처 군부대가 있었다.

군에 있는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고,

그 남자의 제대로 인해

결혼을 약속하며 잠깐의

아쉬운 이별을 했었다.


얼마후

언니 뱃속에는 새 생명이

자라고 있는 걸 알게 되면서

부랴부랴 양가집의 허락과

결혼날짜를 잡았었다.


환갑을 지낸 지 꽤 오래된

홀시어머니에 위로 시누이가 6명,

아래 시누이 한 명이 있다고 했고

인삼밭이 많은 대농의 집안이었다.


엄만 니의 결혼 날짜가 잡히자

바쁘게 움직이셨다.

대구서문시장에서 이불감이나

한복감을 사 오셔서 만드셨고,

우리 집에선 첫 경사인지라

빠짐없이 준비를 해나가셨다.


아버지는 큰딸을 보내야 하는

아쉬움으로 큰딸의 혼수로

가전제품을 장만하셨다.


오빠는 대학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일하며 모은 돈으로

여동생 결혼비용으로 내놓아야

했기에, 아픈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군에서 솔선수범하여

훈련에만 열중하였다.


작은언닌 부모님의 심부름으로

더 바쁘게 움직여야 했으며


어린 난 처음 먹어보는 바나나와

(바나나는 시골에서 정말

귀했고, 비싼 과일이었다)

여러 음식들이 신기했.

예쁜 옷들과 가전제품들을

이리저리 구경하기 바빴다.

부모님과 오빠의 아픈 마음도

모른 체 해맑기만 한 나였다.




외갓집에 도착한 우린

외삼촌, 외숙모와 부모님은

내일 전라도로 출발할

여러 음식 들을 다시 점검하고

부족한 것들은 사기도 하였다.

나는 외할아버지께 인사드리고

외사촌들과 신나게 놀았다.


이모가 '커피'라는 걸 들고 와서

가족들 모두에게 한잔씩 주었고,

나 또한

"이모 나도 커피 먹어볼래!"

호기 있게 먹었으나,

쓰고 맛이 이상하였다.


그날밤 나는

밤을 꼴딱 새우고 말았다.

이모와 외사촌들과 잠을 잔 나는

무서운 이모가 불편하였고,

커피 때문이었는지

밤새 속이 쓰렸다.

이모도 잠이 오지 않았는지

AFKN 방송을 보고 있었다.

우리 집에 없던 T.V가 신기했지만

영어로만 이야기를 하는

T.V방송이 신기하여

밤을 새우며 이모와 보고 있었다.



네이버에서 가져왔어요.


"신기하지 않나?

미국이는 저 나라가.

나는 미국에 살고 싶었다.

자유롭고, 내가 원하는 것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니는 나중에 꼭 미국에서 살아라.

못 살게 되더라도 미국여행은

꼭 가봐라. 얼마나 넓고 자유로운

나라인지 눈에 담아 오너라"


노래와 춤을 사랑했던 이모였다.

외국잡지를 항상 보고 있었고,

60년대에 빨간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녔으며, 쌍꺼풀수술도

하였던 이모였었다.


막걸리보다는 와인을 좋아했고,

쌍화차보다 커피를 좋아한

이모였다. 자유분방한 이모는

새장에 갇힌 새럼 항상

답답함을 느꼈을 것이다.


이모의 끊임없는 미국예찬

이야기를 들으며, 새벽에서야

잠이 들었던 나였다.

잠이 곯아떨어졌을 때

엄마가 깨우는 소리에도

기절하듯 잤었고, 가 도저히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외갓집식구들과 우리 가족들은

전라도로 났다.


내가 일어났을 때 외할아버지께서

"일어났니? 밥 먹자!"

근엄하신 외할아버지께서

밥상을 차려 들고 나에게 오셨다.


어린 날

언니의 결혼식이라는

큰 순간을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 하나의

작은 추억으로 남았다.

삶은 예식장의 하루보다 훨씬 길고

언니의 이야기는

그 이후에도 이어졌으니깐.


굴곡을 지나 홀로서기를

선택한 지금의 언니는

누구보다 단단하고 자유롭게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결국 언니의 진짜 빛나는 장면은

결혼식장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들 속에 있다는 걸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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