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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는 윤별경 Sep 11. 2023

동해물과 백두산이~~

내가 우리집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엄마는 13살까지 일본에 사셨다.

증조 외할아버지께서는,

강제 징역으로 일본에 거주

하셨고,한인 애국단 독립운동

 하시는분들을 도와주시,

일본군인에 의해 돌아가셨다고

엄마에게 들었다.


한인회활동을 열심히하신

외할아버진 나고야에 있는

강제징역으로 끌려온 한국인들의

만남에서 우연히 외할머니 보시고

랑을 하게되어 두분은 결혼을

하셨고,외할아버와 모든

가족들은 나고야에 정착

하셨던것이다.


엄마와 형제들은 나고야에서

태어났으며,학교를 다녔다.

학교에서나 동네에서나

'조센진' 꼬리표에 차별 늘 심해

긴장하며 셨다고 했다.

해방이 되면서 외할아버지 가족들과

외할아버지 형제들은 한국으로 와서

진해에서 생활하셨고

6.25까지 겪으면서 고생하셨다.

몸이 약하셨던 외할머니께서는

막내외삼촌을 낳으시고 돌아가셨다.


어릴때부터 일본에서 사셨던

엄마는 13살에 한국오셔서

모든게 낯설어 생활하기도

힘드셨고,전쟁 겪으면서

외할머니 돌아가시고 막내동생까지

키워야만 했다.


외할아버지의 주선으로

엄마는 그 당시 늦은 나이인

22살에 아버지와 결혼하셨다.

아버진 당시 해군군인 이셔서

진해에 계셨고, 어느모임에서

두분이 만나셔서 외할아버지께서는

아버지를 흡족해 보셨다고 했다.


오빠언니들은 진해에서

태어났으며,오빠는 진해에서

국민학교2학년 까지 다녔다.

외갓집 대구로 이사가게 되면서

아버진 진해근무로 인해 혼자서

조그마한 셋방을 사게 되었고,

엄마와 여기 아버지의

고향으로 오게되었다.

여기는 우리할아버지의,

그위에 할아버지까지

사신동네라서 200년을 살았던

 터전이었고,고향이다.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형제들과

친척들은 여기에서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셨으며

아버지의 둘째형과 세째형은

이곳에서 독립운동 하시다가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아버진 그렇게 친척들과 형님들의

애국심을 어릴때 부터 보았고

(물론,일본의 강압에 의해 변절한

친척분도 계셨다고 하셨다)

군인이 되어서 6.25전쟁에도

나라를 위해 열심히 싸웠고

월남전에서도 참전하셨다.

아버지는 다리에 총알이 박혀

수술한 자국도,그 수술로 인해

다리가 불편하신 것도

자랑스러워 하신 분이셨다.

울 아버지!! 젊었을땐 멋있었네.

나는 이 집에서

부자로 태어나지 않았고

한번도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고

살아 본적이 없으나,

우리의 할아버지,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증조 아버지,

외할아버지, 그리고 우리조상들이

이 나라의 위대한 뿌리가 되어

주시어서,조그마한 잎사귀 하나가

되어도 살아가고 있음을,가슴에 새기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싶다.

그 분들의 대한 자부심으로

아버지,오빠,엄마를 기억하는 친척들이 계셔서 그 추억을 계속 기억하고자

이 집과 동네를 떠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아직 우리동네엔 큰 집이 있고.

큰 집언니들이 살고있다.

차로 10분정도 가면 먼 친척들이

옹기종기 사는 마을도 있다.

우리 아들이 이 집을 계속이어

 갈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전 오빠의 유언대로

"막내 니가 계속 이 집에

살아줬으면 좋겠다"

그 약속을 나는 지키고 싶다.

우리큰집과 사촌언니가 사는집.우리동네에 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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