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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한량의 자아성찰기

제주 바람을 맞으며 자아를 깨닫다

by 제제
으아, 지겨워!


매일이 행복할 것 같던 제주도 백수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알람 없이 아무 때나 일어나 뒹굴거리며 보던 넷플릭스도, 유튜브도 더 이상 재밌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더디게만 흘러갔다. 왜 프리랜서들이 삶에 루틴을 만들어야 한다는지 여실이 깨달은 순간이었다. 메모장을 켜고 하루 루틴을 적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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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 딴 따다다 따라다다


아침 8시, 알람소리에 일어나 토스트를 만들고 커피를 직접 내려 먹고 바닷가로 나갔다. 귀덕리에는 바닷가 정자가 곳곳에 있고, 누군가 버리고 간 캠핑의자가 있었다. 숙소에 있는 책을 한 권 가지고가 파도소리와 바닷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읽었다. 가끔 그 자리에서 스르르 잠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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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이 되면 근처 맛집을 찾아다녔다. 무뚝뚝한 사장님이 만든 돈가스 맛집 라신비, 육수부터 직접 수제로 만든다는 근쌀남, 해녀 아드님이 한다는 함박스테이크 롱로드 등 귀덕리에는 의외로 숨은 맛집이 많았다. 같은 집을 여러 번 찾아가 매일 다른 메뉴를 먹어보는 로망을 실현해 봤다. 제주 주민이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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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가 되면 숙소에 있는 자전거를 타고 가까운 하나로마트에 가서 다음날 먹을 장을 봤다. 강원도에만 있는 줄 알았던 초당옥수수를 사다 먹기도 하고, 아침으로 먹을 빵과 제주 우유를 샀다. 물은 삼다수, 맥주는 제주맥주를 골랐다. 장본 걸 자전거 바구니에 넣고 바닷가를 달리는 기분이 정말 상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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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는 창고로 쓰이던 공간을 개조한 작은 독채가 하나 있는데, 장 봐온 것들을 안주삼아 맥주를 마셨다. 보고 싶었던 영화를 빔 프로젝트와 마샬스피커로 크게 틀고 봤다. 나만의 영화관에서 내가 보고 싶은 걸 틀고, 졸릴 때는 잠시 멈춰 자고, 일어나 술 한잔 하는 꿈만 같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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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자전거를 타고 바다가를 따라 한담해안산책로를 지나 애월에 가보기로 했다. 40분이 넘는 거리였는데 도보만 가능한 구간이 있어 자전거를 한참 낑낑 끌고 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됐다. 겨우 자전거를 끌고 도착한 애월 카페거리에서 바다를 보며 먹은 값비싼 버드와이저 한 잔을 마셨다.



자전거 그냥 세워두지 그랬어요. 아무도 안 가져가는데.



자물쇠가 안 잠겨있어도 도둑질당할 일 없는 낡은 시골 자전거였다. 칠도 다 벗겨지고 안장도 해지고 빠르게 달리면 바퀴에서 쇳소리가 났다. 하지만 버스가 30분에 한 대씩 오는 곳이어서 자전거가 없으면 멀리 가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 낡은 모습이 제주 시골 라이프를 완성시켜 주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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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으면 외로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스스로를 더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떤 때 행복을 느끼는지, 어떤 것을 더 하고 싶은지 온전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시간 그대로를 천천히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 시간 덕에 나는 이렇게 느린 생활과 혼자 꾸려가는 삶이 더 맞을 수 있겠구나 깨달았다.


그렇게 제주 생활 2주 만에 나 자신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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