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해가 서산을 향해 저물어 가고 있다. 매일 퇴근 후 글 쓰는 일에 하루의 마지막 에너지를 쏟는다. 예전의 비추어 볼 때 이렇게 오래도록 무언가에 빠져 본 일이 없었다. 책을 읽고 글감을 찾고 어떻게 하면 더 나은 글을 쓸 것인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찾은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한 직장에서 25년째 근무하고 있는 중이다. 이 정도 근무를 했으니 베테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직업은 우편물을 배달하는 집배원이다. 배달 지역은 통영시 용남면 일대를 담당하고 있다. 농어촌지역이라 노인 인구가 절대적으로 많은 곳이다. 그러다 보니 집배원의 역할을 넘어선 지도 오래된 거 같다. 오토바이를 타고 이 지역 곳곳을 누빈 지도 25년, IMF가 터지면서부터였다.
당시 창원과 마산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상황이 녹록지 않아 귀향을 결정하고 고향인 통영으로 돌아와 집배원 일을 시작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왔던 터라 마을에서 만나는 어르신들은 꼭 내 아버지와 어머니 같았다. 일을 시작하고 현재까지 진심을 담아 도움이 되어 드리고 있는 중이다. 어르신들의 필요한 물품을 구입해 드리기도 하고 독거노인과 노인정에 쌀을 구입해 갖다 놓기를 20년이 넘은 거 같다. 그것이 이 일을 하면서 느끼는 또 다른 행복이자 보람이었다.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의 손과 발이 돼주기도 하고 심부름을 해드리면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해마다 찾아오는 김장철이면 면사무소를 찾아 김장 봉사와 경제적인 지원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무엇보다도 생명을 잃을 뻔한 사람을 두 번이나 구해 드린 적도 있고, 현금 다발이 든 지갑을 주어 주인에게 찾아 드린 적도 있었다. 이러한 소문이 나면서 지역 신문에도 실리고, 면민이 추천해서 주는 시장님 상도 받았다. 개인적인 영광을 떠나 우체국의 위상이 높아진 거 같아 매우 뿌듯했다.
이러한 내용들이 전해지면서 LG의인상에 추천되기도 했었다. 비록 선정은 안 되었지만 집배 일을 하면서 이런 대상에 들었다는 사실만으로 너무 영광스럽고 자부심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봉사와 선행을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한 적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지역 주민들께서 좋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하고. 자기 자식들보다 더 자식 같이 생각해 주시니 고마울 따름이다. 자랑 같아 부끄럽지만 용기 내어 적어 본다.
그러나 처음엔 집배원 일이 평생 내 직업이 될 것이라고 생각 안 해봤다. 도무지 나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거 같아 대개 어색했다. 여름에는 비가 많이 왔어 오토바이를 타고 일을 하니 사고 날 위험도 많고, 겨울에는 추위에 동상에 걸려 손 발이 얼어 부르트고 하루에 수십 번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우편물을 배달하다보면 하루가 어찌 지나갔는지 정신없이 지나간다. 여유라곤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먹고살기 위해서 여기에 들어와 이 고생을 하고 있나 생각하니 앞 길이 막막했다.
몇 번을 그만두기 위해서 시도를 해봤지만 가정이 있고 딸린 가족들도 있다 보니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아내 보고 그만두면 안 되겠느냐고 미친 듯이 애원도 해봤지만 무모한 사정이었다.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계를 이어갈 대안이 있어야 하는데 무턱대고 관둔다 하니 아내는 얼마나 불안했을까 싶다. 촛불 앞에 앉혀 놓은 어린애 같이 행동하는 나를 많이 원망하고 미워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왜 이리 바보 같은 생각으로 세월을 보냈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신세 한탄만 하고 주어진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아무런 노력도 않고, 그냥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는 삶이었으니 말이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남은 인생을 어떻게 하면 나답게 살 것인가? 결론은 목표를 세우고 하루하루 실행에 옮기는 삶을 살아보기로 하고 그렇게 실행 중이다. 하루도 허투루 살지 않는 모습에 아내도 두 딸들도 아주 만족해한다. 삶의 자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동하느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