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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May 29. 2024

23년 일했으니 이젠 좀 쉴래요.

나는야 건물주보다 행복한 '창조주'

김재완 작가(1974년생) 인터뷰

 -저서 :  찌라시 한국사, 찌라시 세계사, 에세이 "나 아직 안 죽었다."

 그 외 경향신문, 오마이 뉴스, 딴지 일보 등 다수 언론사에서 칼럼 진으로 활동 중

김재완 작가와 저는 같은 대학교 같은 과 1년 선후배 사이입니다.


20161월 첫 출근날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일방적으로 해고를 통보한 회사     

2016년 1월 첫 출근날 팀장인 내 책상이 없어졌다. 일방적으로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해고를 통보받은 나. 지금 같았으면 따지기라도 했을 텐데 당시에 난 회사가 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억울했지만 현실을 받아들였다. 나는 20년간 담배를 피운 헤비 스모커(heavy smoker)이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흡연구역에 담배를 피우러 가면 사람들이 내 얘기를 할까 봐 창피해서 하루종일 담배도 피지 않았다. 참다가 퇴근 전에 한꺼번에 많은 양의 담배를 피고 집에 가곤 했다. 아내한테 짜증을 많이 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잘해야 하는데 그땐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면증에 시달렸다. 숙면을 못하니 다음날 집중력이 떨어져서 회사에서 업무 실수도 잦아졌다. 몇 달 후 나는 다른 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평소에 나에게 잘 보이려고 하던 팀장이 있었다. 그런데 공요롭게 도 그 팀장이 있는 부서로 발령이 난 것이다. 그 팀장은 마치 자기가 내 상관인 양 팩스와 커피 심부름을 시켰고 그 굴욕감을 참으며 6개월 버텼다. 나는 원래 매우 활동적인 사람이다. 주말에는 아내와 미술 전시회도 자주 다니고 농구 동호회 활동도 하며 틈틈이 등산도 다녔다. 지금의 아내도 등산 동호회에서 만났다. 마음이 무너지니 몸도 무너져 주말에도 아무 의욕이 생기지 않아 집에만 있었다. 이런 나를 지켜보던 아내가 제주도 자전거 일주를 제안했다. 그런 아내의 제안에 나는 불같이 화를 냈다. 당시 나는 사람들을 만나 어울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아내가 돈을 미리 냈다고도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더 이상 이렇게 무너져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내키지 않았지만 따라나섰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사람으로 치유받다.

자전거 일주는 하루에 자전거를 10킬로미터씩 타야 하는 강행군이라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같이 간 사람들이 정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둘째 날은 너무 힘들기도 하고 비가 많이 와서 포기할까 했다. 그런데 비가 그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또 일행들을 따라나섰다. 3일째가 되니 자전거도 탈만 해졌고 안 보이던 제주도 경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서 조건 없는 도움을 받아 무사히 자전거 일주를 마치게 되었다.  마지막 날 도움을 준 일행들에게 너무 고마워서 뭐라도 해주려고 했더니 아내가 여행 후기를 써 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글이라고는 써 본 적이 없던 내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여행 후기를 써서 단톡방에 올렸더니 다들 재밌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그런데 여행 후기를 쓰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너무 편하고 기분이 좋았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사람으로 치유받은 것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글을 쓰는 순간은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있다, 여행 후기를 쓰면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내 생각을 쓰는 데 해방감마저도 느껴졌다. 이런 해방감이 지금까지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이기도 하다. 감히 단언한다. 나는 강남 건물주보다 더 행복한 ‘창조주’라고.   


< 제주도 자전거 일주하는 모습 >


아내를 위해 쉽고 재미있게 쓴 역사에 대한 글이 나를 작가로 만들었다.   

어느 날 집에서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는데 내용이 너무 어렵고 지루했다. 문득 아내처럼 역사에 관심도 없고 잘 모르는 사람들이 봐도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는 역사에 관한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퇴근을 하고 집에 와서 가입했던 카페 게시판에 이틀간 익명으로 글을 써서 올렸다. 혹시나 악플이 달릴까 봐 3일 후에 쓴 글을 찾아봤는데 재밌다는 댓글이 3개가 달려있었다. 단지 재밌다는 댓글 3개에 용기를 얻어 매일 퇴근 후 역사 사건에 관한 글을 석 달간 써서 올렸다. 나는 딴지일보 초창기부터 계속 읽어 온 독자이다. 딴지 일보를 읽으면서 막연하게 내가 쓴 글이 이런 곳에 기사로 나가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있었다. 딴지 일보 독자 투고란에 내가 쓴 글을 한번 투고나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아무 기대 없이 신사임당에 관한 글을 써서 올렸다. 딴지 일보에는 역사 덕후들이 많다. 덕후들의 지적이 무서워 2주 정도 들어가 보지 않다가 궁금해서 들어가 보니 내가 쓴 신사임당에 관한 글이 딴지 일보에 기사로 올라가 있었고 기사 아래에는 딴지일보에 연락을 하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전화를 했더니 글을 써 놓은 게 더 있냐고 물었다.  40개 정도 있다고 하니 ‘찌라시 한국사’라는 타이틀을 줄 테니 연재를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딴지일보에 연재를 하게 되었고 후에 출판사에서 이것을 책으로 출판해 보자는 제안까지 받게 되어 ‘찌라시 한국사’라는 책을 내게 되었다. 이후 ‘찌라시 세계사’라는 책까지 역사책 2권을 냈다. 이렇게 나는 작가가 됐다.     


돈도 못 버는 일을 왜 해? 그럴 시간에 주식이나 공부하지...”     

어느 날 아내와 함께 모임에 갔다. 무기력해 있던 내가 글을 써서 책까지 내게 된 것을 아내가 모임에 온 사람들에게 자랑을 했다. “우리 남편 정말 대단하지 않아? 글 쓰는 걸 배운 적도 없는데 책도 내고 원고료도 받았어.”라고 얘기를 하자 모임 참석자 중 한 명이 “작가는 아무나 되냐? 그거 하면 돈이나 돼? 돈도 못 버는데 뭐 하러 그런 일을 해? 글 쓸 시간에 중국어 공부를 하던지 주식을 하는 게 낫지 않아?”라며 비웃는 거였다. 나는 그냥 좋아서 하는 일인데 사람들은 이런 나를 무시했다. 나는 너무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그날 집에 가서 글 써 놓은 것을 다 모아서 출판사마다 투고를 시작했다. 나를 무시한 그들에게 복수할 심정으로 말이다. 백군 데쯤 보냈고 드디어 연락이 와서 계약을 하게 됐다. 파주 출판도시에서 첫 계약을 하고 나오며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이 날은 태어나서 제일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런 내 얘기를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공유하고 다 같이 용기를 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오 마이 뉴스에 투고했고 높은 조회수를 기록해서 그해 ‘뉴스 게릴라상’도 받게 됐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오 마이 뉴스에서 ‘X의 오피스 살롱’이라는 제목으로 1년간 연재를 하게 해 주었다. 이 연재 글을 모아 ‘나 아직 안 죽었다’라는 에세이를 출간했고 국방부 선정 도서 후보 결선까지 올라갔는데 아깝게 선정되지는 못했다.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기회도 있었다. ‘나 아직 안 죽었다’라는 에세이가 출간되고 EBS에서 역사를 주제로 출연 제의가 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전화를 받은 날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있었다. 다음날까지 답변을 달라고 했고 2주 후 출연이라고 했다. 당시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결국은 출연하지 못했다. ‘X의 오피스 살롱’을 읽고 동아일보에서 ‘X세대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X세대에 관한 특집 기사를 써달라고 원고 청탁도 왔다. “나는 작가다”라는 마음으로 회사를 다니다 보니 신기하게 월요병도 없어졌다. 모든 병은 마음에서 생긴다.  


< 강연하는 모습과 강연 후 사인회 모습 >

 

23년간의 회사 생활을 접고 이제는 전업 작가로 살기로 했다.

지난 2월에는 회사를 그만두고 글쓰기에 집중하고 있다. 나는 매우 계획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인생을 되돌아보면 계획대로 된 일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이제는 아무 계획 없이 살아 보고 싶다. 제주도 한달살이도 해보고 여행도 다니고 카페에서 전업 작가처럼 종일 글도 써보고 그렇게 몇 개월씩 쉬어보고 싶다. 23년 일했으면 이제는 좀 쉬어도 되지 않나? 3년째 신춘문예에도 도전하고 있고 최근에는 가상의 역사 웹소설을 써서 네이버에 올렸다. 네이버에는 누구나 글을 써서 챌린지 리그에 올릴 수 있다. 글이 괜찮으면 베스트 리그로 올라가고 거기서 또 반응이 좋으면 네이버와 정식으로 계약을 하게 되는데 지금 챌린지 리그에서 베스트 리그로 올라간 소설이 하나 있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잘 쓸 수 있는 부분이 역사 얘기니까 역사에 관한 소설도 계속 쓰고 있고 기회가 되면 시나리오도 써 보고 싶다. 어떤 여성 독립 영화감독의 친구가 “너는 왜 돈도 안 되는 영화를 찍고 그러니? 그냥 직장이나 다니지 그래?”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감독이 “영화 찍으면 다 봉준호 감독처럼 돼야 해?”라고 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동감한다. 글을 쓰면 다 김영하 작가나 유시민 작가처럼 돼야 하는 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재미있게 쓰면 된다. 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40살이 넘어서 알게 됐는데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자기가 무슨 일을 좋아하는지 모르고 죽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에피소드)

통 큰 복지와 기부로 유명한 우리나라 재계 20위안에 드는 모기업 회장님과의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그 기업의 대표 변호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회장님께서 작가님이 쓰신 역사책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전해 달라고  말했다. 그 회장님은 역사 분야를 좋아해서 직접 출판사도 만들어 근현대사 책을 쓰기도 했다. 회장님과의 식사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했으나 회장님과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다. 당시 회장님은 감옥에 계셨기 때문이다...   



김재완 작가 브런치 주소

https://brunch.co.kr/@jy318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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