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의 천문 기록, 특히 일식 기록을 가지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위치가 한반도에 있지 않고 대륙에 있었다는 주장을 아직도 볼 수 있다. 이미 지난 글에서 일식의 식분이 높아 최적으로 보였다는 곳과 알려져 있는 삼국의 수도에서의 일식 관측의 식분 차이가 개개의 일식마다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서술한 바 있다. 특히 이러한 주장이 더 의미가 없는 이유는 역사서에 기록된 천문 현상은 그 책이 일관들이 써서 바치는 '측후단자'가 아닌 이상 실제로 관측에 의해 기록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혼재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문기록이 모두 독자적으로 관측한 사실만을 기록한 것이고, 그래서 그 기록들로부터 각각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일관들이 관측했던 위치를 유추해 낼 수 있다고 믿고, 그 위치가 우리가 알고 있는 한반도가 아닌 중국 대륙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래 두 가지 천문 기록에 대해 답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어쩌면 일식보다도 관측 위치가 한반도인지 대륙인지를 극명하게 나눌 수 있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서기 186년인 고국천왕 8년에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8년(서기 186) 여름 4월, 을묘에 형혹(熒惑, 화성)이 심성(心星) 자리에 머물렀다.
5월, 그믐 임진에 일식이 있었다.'
- [네이버 지식백과] 고국천왕 [故國川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심성은 지금의 전갈자리 알파별인 안타레스를 말한다. 적색 거성으로 지금도 여름철 남쪽 하늘에 보이는 주황색 별이 안타레스이다. 붉은 별의 대표 격인 안타레스에 화성이 만나는 것은 큰 전란의 징조로 여겼다. 더욱이 그 만나는 방법이 화성이 역행하여 머무는(守) 형태일 때는 더 그렇다. 당시 화성의 겉보기 운동을 살펴보면 이와 정확히 들어맞는 것을 알 수 있다.
186년 화성 역행
이것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따라서 후한서 천문지에도 같은 기록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中平三年四月,熒惑逆行守心後星
중평 3년 4월, 형혹성이 역행하여 심후성에 머물렀다'
- 후한서 천문지 (한문고전 자동번역서비스의 번역문을 자체 편집)
그런데 후한서 천문지에는 위의 기록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연이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十月戊午,月食心後星。占曰:「為大喪。」後三年而靈帝崩
10월 무오일에 달이 심후성을 먹었다. 점사에 이르기를 큰 상이 있으리라 하였다.
3년 후 영제가 세상을 떠났다.'
- 후한서 천문지 (한문고전 자동번역서비스의 번역문을 자체 편집)
186년 달-안타레스 엄폐 현상
위 그림과 같이 186년 음력 10월(양력 11월 27일)에 정확하게 안타레스를 달이 가리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 현상에 대하여 후한서 천문지에는 기록이 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이유는 아래 동영상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날 달이 안타레스를 가리기 시작했을 때 지금의 서울의 위치에서는 이미 해가 뜬 시점이었다. 달과 안타레스가 점점 가까이 접근하는 것까지만 보이다가 이후엔 동이 트이고 만 것이다. 그러나, 흔히 대륙 삼국설을 운운하는 분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고구려의 수도가 멀리 대륙의 몽골 쪽에 있었다면 이 엄폐 현상을 관측하지 못했을 이유가 없다. 같은 시간에 한반도보다 서쪽인 몽골의 울란바토르는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사기, 후한서 천문지가 각자 실측에 의한 기록을 했다고 봤을 때 중국 쪽에서는 달이 안타레스를 가리는 현상을 보고 기록할 수 있었기에 후한서 천문지에 기록이 있는 반면, 한반도 또는 한반도와 같은 경도상의 북부 만주 지역에 있었을 고구려에서는 해당 현상을 보지 못해 삼국사기에 기록이 없는 것은 매우 '합당하다'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례는 한 가지가 더 있다. 통일신라 성덕왕 시절인 735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을해년(乙亥年, 735)
봄 정월형혹성(熒惑星 화성(火星))이 달을 범(犯)하였다.
○ 김의충(金義忠)을 당(唐) 나라에 보내어 신정(新正)을 하례하였다.
○ 2월 부사(副使) 김영(金榮)이 당(唐) 나라에서 졸(卒) 하니 광록 소경(光祿少卿)을 증직(贈職)하였고, 김의충이 돌아올 제 조칙(詔勅)을 내려 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신라에 획급(劃給)하였다.
- 삼국사절요 (제작-동방미디어)
735년은 당나라 현종 때인 개원 23년이다. 개원성세라는 말이 있듯이 이 때는 당 현종이 아직 양귀비를 만나기 전이라 치세를 이루었던 시기였다. 위의 삼국사절요 내용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 해에 당나라가 신라에게 패수(대동강) 이남을 신라의 영토로 확급한다는 말이 있다. 이 패수(浿水)는 압록강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청천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물론 윤내현, 이덕일 같은 사람은 요하보다도 서쪽인 난하를 패수로 보기도 한다.
이미 서술한 바 있지만 역사 기록에서 범월(犯月)과 입월(入月)은 그 의미가 다르다. 범월은 달과 천체의 거리가 초 단위로 가깝게 근접한 상태를 의미하지만 입월은 아예 달이 특정 천체를 완전히 가리는 '엄폐'현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화성-달 간의 엄폐 현상이 있었을 때 과거 사람들은 '형혹입월(熒惑入月)' 또는 '월식형혹(月食熒惑)'이라 기록하였고, 엄폐가 아니라 매우 가까이 근접하였을 경우 '형혹범월(熒惑犯月)'이라고 기록하였다.
735년의 기록은 '범월'이기 때문에 달과 화성이 매우 근접하였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이 기록은 실제로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구당서, 신당서 본기 및 천문지나 오행지, 자치통감, 개원점경 등 중국 문헌에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천문 현상이다. 어떤 사서에서 발췌를 했는지 모르나 삼국사기에만 기록이 되어 있는 독자 관측기록이다. 따라서 삼국사기 천문현상의 독자관측기록이 있는가를 물어본다면 자긍심을 가지고 답할 수 있는 사례인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날 형혹범월로 기록된 현상은 '범월'이 아닌 '입월' 현상이었다.
위 동영상처럼 화성을 달이 가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공교롭게도 엄폐 현상이 발생하는 시기가 서울 위치에서는 해가 뜨는 시각과 맞물려 있었던 것이다.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서 보았다면 해가 뜨는 시점에 화성과 달이 옆에 가까이 붙어 있는 상태까지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아침이 밝기 전에 화성이 달에 간신히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수도 있지만 별을 보는 사람이라면 한밤중엔 맑았다가도 새벽이 되면 안개나 구름 때문에 철수하는 경우는 흔하다는 것을 알 것이고 겨울에 그 시간까지 일관이 올빼미의 눈으로 철저히 관측했으리란 보장도 없다. 무엇보다도 화성과 달이 눈에 띄게 엄폐 현상을 이루었던 모습을 보지 못해 '형혹입월'이라 못하고 '형혹범월'이라 기록한 것은 관측자가 엄폐 현상을 볼 수 없는 곳에 있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735년 달-화성 엄폐 시 관측 가능 지역(음영 부분)
이렇게 엄폐 현상이 일출 시각과 맞물렸던 한반도와는 달리 중국 대륙 쪽은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각이었으므로 엄폐 현상을 관측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현상이 중국 사서에 없는 것은 의외다. 굳이 옛날처럼 전조현상으로 본다면 불과 2년 뒤인 737년에 드디어 당 현종이 양귀비를 만나 그동안의 치세를 말아먹기 시작하는 시기이니 말이다.
요컨대 실제로는 '형혹입월' 현상을 기록한 유일한 나라인 신라에서 '형혹입월'이 아닌 '형혹범월'로 기록하였다는 것으로 볼 때 당시 신라의 영역이 어디까지였나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다.
사실 한반도와 중국 대륙은 황해를 사이에 두고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위의 두 사례처럼 달이 화성과 안타레스를 가리는 시각과 해가 뜨는 박명 시각이 맞물리는 간발의 시간차로 관측이 가능한가를 구분할 수 있는 절묘한 사건이 벌어졌다. 삼국사기 일식기록을 왜곡하며 대륙에 삼국이 있었다고 운운하던 사람들은 똑같은 삼국사기 기록인 위 사례에 대하여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