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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전문가윤담헌 Oct 27. 2022

'지하 일식' 기록으로 알아보는 조선의 영역

실록이 밝히는 아메리카 조선설의 허구

 대륙 조선설보다 더욱 기가 막히는 설이 바로 아메리카 조선설이다. 이 분들의 이야기하시는 내용을 들어보면 임진왜란이 전 지구적으로 발생한 세계대전이라 하는데 과거 조선은 츠펑(적봉)과 로스앤젤레스, 즉 L.A 양쪽에 수도가 있었다가 순조 이후로 한반도로 들어왔다등, 황당해서 듣고 있으면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일식 기록을 가지고 이래저래 주장하는 것은 이제 놀랍지도 않을 정도이다. 가령 일식이 발생했을 때 달의 본그림자가 한반도나 아시아가 아닌 전혀 다른 지역, 이를테면 아메리카, 아프리카, 남극 등을 지나가기만 하면 어떻게 보지도 못한 일식을 보았다고 적느냐, 곧 그곳이 우리의 영토다라고 하는 식이다.

 이렇게 일식 기록을 가지고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삼으려는 분들의 공통점은 역사 속 일식 기록이 무조건 '눈으로 직접 보아야 적을 수 있는 실측기록'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일식 기록은 실측 기록 외에 일관들이 예측(추보)하여 보고한 기록, 다른 나라로부터 전달받은 기록들도 모두 존재한다.

 이것을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만약 초하루에 일식이 낮에 보일 것 같으면 관상감에서 일식을 준비해야 한다는 보고가 올라오고 임금은 일식이라는 불길한 현상을 대비해 구식례(求食禮)라는 제사를 지내야 한다. 실제로 관측 가능한 일식이 있었을 경우 구식례를 준비하고 거행하는 기록이 실록에는 있다. 그렇지 않고 일식이 있기는 하나 관측이 불가능한 일식은, 그저 '일식'이라는 기록만이 있고 구식례를 준비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상참, 경연을 하지 않고 임금이 재계하는 정도로만 끝난다.

 어떤 경우에는 친절하게 관측이 불가능한 일식을 '지하(地下) 일식'이라고 기록해 놓은 경우도 있다. 그 외에 일식을 보지 못할 것으로 판단할 때 보고한 단어는 '야식(夜食)', '대생광(帶生光)' 등이 있다.

 따라서, 실록의 일식 기록 중 일식이 보이지 않아 구식례를 하지 않은 기록, 지하 일식이라 적힌 기록에서 달의 그림자가 지나간 곳은, 조선의 관점에서 '지하'로 인식되는 곳이므로 조선의 강역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렇게 지하 일식에서의 일식도를 들여다보며 지구에서 조선의 영역이 아닌 곳을 지워가면 조선의 강역이 어딘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몇 가지 지하 일식 기록을 들어 보겠다.




 임진왜란이 끝난 1600년 (선조 33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선조 33년 6월 1일 임신 3번째 기사 1600년 명 만력(萬曆) 28년

정원이 아뢰기를, "오늘 정사(政事)하라고 전교하셨는데 오늘 마침 지하(地下) 일식(日蝕)이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내일 하라고 전교하였다.'


분명 선조실록에 지하 일식이란 단어가 나왔다. 언급했듯이 이 날 일식의 달그림자가 지나갔던 곳은 조선의 입장에서 모두 지하인 것이다.

1600년 6월 10일 일식

 위 그림의 원통 모양의 궤적이 달의 그림자가 지나간 장소이다. 캐나다, 미국 중부에서 동부,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일부에서 시작하여 유랍과 아프리카를 지나 중앙아시아, 인도 지역까지 일식을 관측할 수 있었다. 저 영역에 해당하는 곳은 조선의 입장에서는 '지하(地下)'이므로 조선의 영역이 아니다.

 아메리카 조선을 외치던 분들에게는 애석한 일이다. 아, 물론 북아메리카 서부와 남아메리카가 남아있다. 그럼 다음 기록을 보자.


'명종 5년 7월 6일 정유 2번째 기사 1550년 명 가정(嘉靖) 29년

 관상감(觀象監)이 아뢰기를, "오는 8월 초하룻날 일식(日蝕)이 있는데, 내외 편(內外篇)과《대명력(大明曆)》의 세 가지에 모두 ‘지하에서 일식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외편의 회회법(回回法) 에는 ‘복원(復圓)은 묘시(卯時) 초2각(初二刻)이고,  일출은 묘시 정 3각(正三刻)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간격이 단지 1각 밖에 안 됩니다.

 만약 복원 전에 해가 뜨거나 복원하고 일출했을 때 그 색깔이 이상하다면 이는 예사로운 변이 아닙니다. 미리 일식을 구제하는 조치를 하지 않았다가 이러한 변이 있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일식 구제하는 조치의 승전을 받들고자 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지하 일식일 것으로 예상되나 회회법으로 계산하면 해가 뜰 때 1각(刻) 정도 생길 수 있다고 하니 구식제는 준비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럼 이 날의 일식도는 어떠할까.

관상감의 말대로 한반도를 지나가지 않으므로 지하 일식이 맞았던 일식이다. 그리고 일식의 그림자는 아메리카 서부와 남아메리카 지역을 지나간다.

 이 정도면 조선의 영역을 지도에 그릴 때 아메리카 부분은 완전히 지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자, 그럼 대륙 조선은 어떨까. 기록을 한 개 더 들여다보자.

 헌종실록의 기록이다.


'해에 일식(日蝕)이 있었는데, 일식은 지하(地下)에 있었다.'

- 헌종 14년(1848) 9월 1일 1번째 기사


 지하 일식이라 기록한 것처럼, 승정원일기에서는 이날 날씨가 맑았음에도 일식을 보았다거나 뭔가 어떤 행동을 취한 사실이 없고 3일 전인 8월 27일 기사에만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또 아뢰기를, 오는 1일은 윤대(輪對)를 할 날짜인데, 일식으로 인한 재계(齋戒)와 서로 겹치므로 탈품(頉 稟) 한다는 뜻으로 감히 아룁니다.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승정원일기 헌종 14년(1848) 8월 27일 기사 (한문고전 자동번역 서비스 사용)


동문휘고의 일월식 자문을 알아보자.

 위 그림에서 9월 10일에 온 청나라 예부의 일식 자문은 다음 해인 1849년 2월 초하루의 일식에 대한 자문이다. 1848년 9월에 조선에 일식이 있을 것이란 청나라의 통보는 없다.

 그럼 이 날 일식은 어느 지역까지 볼 수 있었을까.

 위 구글맵 그림의 가운데에 보이는 보라색 실선이 일식을 관측할 수 있는 관측 한계선이다.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에서는 일식 관측이 가능하나 한반도에서는 관측이 불가능한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위 일식의 관측 한계선 서쪽의 지역, 대부분의 중국 대륙 지역은 조선의 관점에서 지하이므로 조선의 영역이 될 수 없다.

 대륙 조선의 수도라는 '츠펑' 지역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나마 요동, 만주 부분은 살아있지 않냐고? 마지막으로 기록 하나만 더 보도록 하자. 원래 선동은 간단하나 해명은 엄청난 수고를 들여야 하는 법이다. 무려 '세종실록'의 기록이다.

 


 때는 1431년인 세종 13년 3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역서(曆書)란 지극히 정세(精細) 한 것이어서 일상생활에 쓰는 일들이 빠짐없이 갖추어 기재되어 있으되, 다만 일식(日食)·월식(月食)의 경위만은 상세히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는 고인(古人)도 역시 몰랐던 모양이니, 우리나라는 비록 이에 정통하지 못하더라도 무방하긴 하나, 다만 우리나라를 예로부터 문헌(文獻)의 나라로 일컬어 왔는데, 지난 경자년에 성산군(星山君) 이직(李稷)이 역법(曆法)의 교정(校正)을 건의한 지 이미 12년이 되었거니와, 만약 정밀 정확하게 교정하지 못하여 후인들의 기소(譏笑)를 사게 된다면 하지 않는 것만도 못할 것이니, 마땅히 심력을 다하여 정밀히 교정해야 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산수(算數)에 밝아서 방원법(方圓法)을 상세하게 아는 자가 드물 것이니, 내가 문자를 해득하고 한음(漢音)에 통한 자를 택하여 중국으로 보내어 산법을 습득케 하려고 하는데 어떤가.'

- 세종실록 세종 13년 3월 2일 병인 1번째 기사 中


 쉽게 요약하자면, 문헌의 나라라고 칭찬받는 조선에서 일월식의 예측 계산은 허접하기 때문에 체면이 말이 아니니 인재를 뽑아 중국(명)으로 보내어 산법을 익히게 하는 것이 어떠냐는 말씀이다. 이에 신하들이 동의하고, 김한, 김자안 등이 추천을 받아 가게 되는데 이들은 서운관 관원이 아니라 역관(譯官)들이었다. 산수에 밝다기보다는 일단 말이 먼저 통해서 중국의 수학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얻어 올 수 있는 사람을 구했다고 볼 수 있다. 세종대왕 때까지만 해도 비록 조선이 명나라에 사대하는 나라였다고 하지만 중, 후기와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사안에 대하여 중국에서 알려주는 대로 받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직접 자주적으로 풀어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해 겨울 서운관의 추보로 다음 해인 1432년 정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을 것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후 실록을 보면 일식과 월식에 대하여 상당히 신경 쓰는 모습이 나온다. 특히 정월 초하루에 일어나는 일식이었기 때문에 더 했는지도 모른다.


'예조에 전지하기를, "일식과 월식은 천변의 큰 것이니 마땅히 음악을 끊고, 형륙(刑戮)을 제거하고, 짐승의 도살(屠殺)을 금지하고, 조회와 시장을 정지시켜 천변을 두려워해야 될 것이니, 그것을 상정소 제조와 함께 헤아려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 세종실록 세종 13년 12월 20일 신해 2번째 기사


그리고 일식 당일인 1432년 음력 1월 1일, 궁궐에서는 난리가 난다.


'임금이 소복(素服) 차림으로 근정전 영외(楹外)의 섬돌 위에 나아가서 의례(儀禮)대로 구식하였으나 마침내 일식하지 아니하였다임금이 입내하여 서운관(書雲觀)의 관원에 명하여 종일토록 측후(測候)하게 하였다. 북경에 갔다가 돌아온 통사(通事) 이연(李讌)을 불러서 묻기를, "중국에서도 또한 원일에 일식이 있겠다고 말하더냐." 하니, 대답하기를, "중국에서도 역시 원일 오시(午時)에 일식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 세종실록 세종 14년 1월 1일 신유 2번째 기사


 그토록 준비에 힘쓰던 일식이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당황한 세종은 서운관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아보도록 하면서 그제야 명나라에서는 일식을 예측하였는지 물어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연초에 일월식 추보에 대한 계산법에 대하여 어떤 정보를 얻어 왔는지 모르겠으나 서운관의 자체 계산으로 얻어낸 일식 추보에 대하여 나름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날 일식은 어떻게 진행된 것일까.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녹색 선이 이 날 일식의 관측 한계선이다. 중국의 베이징, 츠펑과 같은 곳은 정상적으로 이 날 오시(午時)에 일식을 관측할 수 있었지만 한반도에서는 평양 이남부터 일식을 관측할 수 없었다.

실록에는 이 날 일식이 발생한 기록이 있다.


'宣德七年春正月辛酉朔日有食之'

- 명실록 선덕 7년 정월 1일 기록


 저 관측 한계선이 바로 세종대왕 시절의 조선과 중국(명)의 경계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려주는 선인 것이다. 이후 신하들은 추보에 실패한 서운관 관원에 벌을 주자고 하지만 세종대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분수(分數)가 매우 적어서 짙은 구름으로 인하여 못 보았을는지도 모르니, 각도에 공문을 보내어 물어보게 하라. 또 중국에서도 또한 정월 원일에 마땅히 일식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하니, 이것은 관측을 잘못한 죄는 아니다. 각도의 회보(回報)와 중국 조정에 들어간 사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다시 의논하게 하라.'

- 세종실록 세종 14년 1월 4일 갑자 2번째 기사


 이후 소식은 실록에 있지 않으나 아마도 평안도 관찰사나 의주 감사로부터 일식이 있었다는 회보는 받았을 것이다.

 이후 세종대왕은 절치부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해 음력 6월 보름에는 개기 월식이 있었는데 이 날 월식은 달이 뜨는 시점에 걸쳐서 월식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다른 때보다도 월식이 발생하는 시각에 대하여 정밀한 추산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후 음력 10월 30일의 경연에서 세종대왕의 언급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일력의 계산[曆算]하는 법은 예로부터 이를 신중히 여기지 않는 제왕(帝王)이 없었다. 이 앞서 우리나라가 추보(推步) 하는 법에 정밀하지 못하더니, 역법(曆法)을 교정(校正)한 이후로는 일식·월식과 절기(節氣)의 일정함이 중국에서 반포한 일력[曆書]과 비교할 때 털끝만큼도 틀리지 아니하매, 내 매우 기뻐하였노라.

 이제 만일 교정하는 일을 그만두게 된다면 20년 동안 강구(講究)한 공적(功績)이 반도(半途)에 폐지(廢止)하게 되므로, 다시 정력을 더하여 책[書]을 이루어 후세로 하여금 오늘날 조선(朝鮮)이 전에 없었던 일을 건립(建立)하였음을 알게 하고자 하노니, 그 역법을 다스리는 사람들 가운데 역술에 정밀한 자는 자급(資級)을 뛰어올려 관직을 주어 권면하게 하라.'

- 세종실록 세종 14년 10월 30일 을묘 1번째 기사


 위의 기사는 칠정산이 반포되는 1444년보다 12년 전의 기록이다.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은 비록 이해 정월 초하루의 일식은 추보가 실패했지만 이후에 일어났던 월식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맞았기에 가능할 것이다. 세종대왕은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12년을 더 연구해 마침내 칠정산을 편찬하게 되었다.

 이 정도면 일식이 발생하지 않은 기록을 가지고 조선의 강역이 어디까지인지 분간을 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중국과의 사이를 두고 일식의 있고 없고의 차이가 나는 오묘함을 겪고 그것을 극복하려 역법 연구에 매진한 세종대왕을 보면서 대륙에 조선이 있었다느니, 아메리카에 있었다느니 하는 바보 같은 후손은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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