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를 통틀어 한반도를 달의 본그림자가 지나간 것은 아래와 같이 대략 14회 정도 된다.
위의 일식들은 무조건 한양을 지나간 일식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 중 일부라도 지나간 일식들이다. 이 중 조선왕조실록에 '개기일식이 있었다'로 표현되는 '일식기(日食旣), 일유식지기(日有食之旣)'로 표현되는 경우는 위 표의 파란색으로 표시된 3건뿐이다.
그 외 실록상에 개기일식으로 기록된 것은 실제로는 달의 본그림자가 한반도를 지나가지 않은 부분일식임에도 '日食旣'로 기재된 경우들이다. 이렇게 개기일식이 아님에도 개기일식이라 표현하는 경우는
1) 일식에 대한 정보를 명나라 또는 청나라로부터 받은 자문으로 확인하였기 때문에 기재한 경우
2) 실제로는 아니나 자체적인 추보에 의하여 나온 것이 개기식이었기에 기재한 경우
3) 당시의 정치적 상황의 암울함을 천변으로 빗대어 공간적 무대 장치로 사용하기 위해 기록한 경우
의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경우를 소개하려 한다.
1697년 숙종 23년 윤 3월 1일의 실록 기록이다.
'개기 일식(皆旣日食)을 하였다.'
辛巳朔/日食旣。
- 숙종실록 숙종 23년 윤 3월 1일 1번째 기사
짤막하게 개기일식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당시 일식의 본그림자는 한반도를 지나가지 않았다. 아래 그림처럼 일식의 본그림자는 베이징 부근을 관통하여 지나갔다.
1697년 윤 3월 일식도
실제로는 한반도에서 개기일식을 볼 수 없는 일식이었기 때문에 개기일식을 볼 수 있는 위치까지, 만주와 대륙 북부까지가 조선의 영역이었다는 대륙조선설을 주장하는 분들이 자주 인용하는 사건이다. 심지어 위 그림에서처럼 베이징 근처에 위치한 '츠펑', 즉 적봉이란 곳이 개기일식을 볼 수 있는 곳인데, 이곳이 고대 홍산문화와 조선을 연결 짓는 '적봉 수도론자'들이 조선의 수도라 주장하는 곳이니, 그들 입장에선 주장하고자 하는 바와 소름 끼치게 잘 들어맞는 실록의 기록으로 보일 것이다.
문제는 이런 주장을 하는 분들이 실록만 보고 그 외 다른 역사 기록을 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인조 인후 조선왕조실록과 '매치업'이 되는 대표적인 기록물인 '승정원일기'가 있는 데도 말이다.그 밖에도 17세기 이후는 동문휘고, 각사등록 등 온갖 외교문서와 장계 문서가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시대이다. 실록의 한 줄 가지고 장난치기엔 다른 증거가 많다는 것이다.
동문휘고의 일월식 자문 편에는 수많은 일식과 월식이 있을 것이란 청나라의 자문과,해당 일식이 예측대로 보였는지 안 보였는지를 답하는 조선 측의 자문이 실려 있다. 애석하게도 청나라에서 전달해 주기 시작한일월식 자문은 1723년부터였기 때문에 1697년 이 날의 일식 자문은 없다. 그러나 역서 자문을 보면 이미 1697년보다 훨씬 전부터 조선은 청나라에 매년 역서(시헌력)를 보내줄 것을 청해 왔다. 이런 식으로 일월식에 대한 정보의 교류가 있던 것은 원나라 때부터이다. 고려사에는 원나라에서 일식이 있을 것이라 했는데 일어나지 않았다는 식의 기록이 있다.
하지만 1697년의 시헌력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모양이고 각사등록에도 마침 이 해 장계들이 모두 소실되어 없다.
그럼 승정원일기 하나 있는데, 사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날의 승정원일기를 보자.
1697년 윤 3월 1일 승정원일기
이 날은 아침에 일식을 충분히 관측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식을 보았거나 하는 내용이 없다. 당연한 것이 이 날 날씨가 음(陰), 즉 흐렸기 때문이다. 즉 이 날 궁궐에서는 일식을 관측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록에 '개기일식이 있었다'라고 써놓은 것은 바로 개기식이 있을 것이라는 청나라의 자문(咨文)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1697년에 일월식 자문은 확인할 수 없다 해도 특히 북경 지방을 본그림자가 관통하는 개기일식에 대하여 청나라가 조선으로 그 소식을 보내지 않았을 리가 없다.
승정원일기에는 여기에 일식과 관련된 한 가지 기록이 더 있다. 당시 조선에서는 지방의 관아나 관찰사에게 일식 또는 월식을 실제로 관측했을 때 식심 도형(食甚圖形)의 모양을 그려 중앙 정부로 보냈다.
동문휘고에 그려진 식심 도형
1697년 이 날에도 숙종은 각 지방에 일식의 도형을 바칠 것을 주문했는데 이와 관련된 기사가 있다.
'김세익이 아뢰기를, 이번 윤 3월 1일에 일식 도형(圖形)이 서울과 지방이 대체로 서로 같은데, 방금 삼가 강원 감사 유득일(兪得一)이 올린 그림의 도형(圖形)을 보니 동서로 모두 식을 그려 올렸습니다. 일식(日食)의 법은 원래 좌우에 모두 식을 하는 이치가 없는데, 이번에 그린 형체는 대단히 법을 어긴 것인데, 상세히 획급해 보지도 않고서 잘못 그려 낸 실상이 참으로 매우 놀라우니, 감사 유득일(兪得一)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니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승정원일기 1697년 윤 3월 14일 15번째 기사, 번역은 한문고전 자동번역을 하여 일부 문맥에 맞게 수정했음.
비록 궁궐이 아니었어도 한양에서 일식을 관측하여 올라온 도형이 있었는데 이것이 지방에서 올라온 것과 대체로 비슷했다는 말이 있다. 당연한 것이 아래의 일식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 날 한반도 전체가 0.8부터 1.0 이하의 식분 영역에 걸쳐 있기 때문에, 당시 조선의 어느 곳에 있어도 경미한 차이가 있을 뿐 대체로 동일한 형태의 일식을 관측할 수 있었던 것이다.
1697년 윤 3월 1일 일식도
만약 개기일식이 실제로 있던 곳이 수도였다면 '서울과 지방의 일식도형이 대체로 비슷하다'라는 이 말은 성립이 안 된다. 이것이 성립이 되려면 당시 조선은 위 일식도의 본그림자의 지름 정도밖에 안 되는 한반도보다 작은 소국(小國)이 된다. 따라서 승정원일기의 기록은 조선의 수도가 츠펑같은 곳이 아님을 밝히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실시간으로 기록한 일기가 아니라 그 날짜의 여러 문서들을 조합하며 때로는 사관의 의견까지 기록한 편년체 기록물이다. 유성과 같은 국지적인 성변(星變)은 실제로 보고 쓴 기록일 가능성이 높으나 그것 또한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높은 것일 뿐이다.
명 또는 청나라로부터 일월식에 대한 통보를 받던 조선 시대에, 실록에 나타나는 일식 기록은 실제로 본 것뿐 아니라 비록 실제 관측한 사실이 아니더라도 자체적으로 알았던, 통보를 받았던 그날 일식이 있다고 인식한 것까지 기록한 것이다.
대륙조선설과 같은 유사역사학의 무차별한 공격이 현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돌아왔다는 말도 있다. 조선의 수도를 대륙으로 옮겨 보려다가 조그만 도시 국가로 전락시키는 우를 범하지 말자.
1646년(인조 24년, 병술년) 음력 12월 1일의 일식 또한 개기일식이 아니나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 데 이 경우는 위에 언급한 세 가지 이유 중 세 번째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개기 일식이 있었다. '
朔癸酉/日食旣。
- 인조실록 인조 24년 12월 1일 기사
해당 일식의 달의 그림자가 지나간 궤적은 아래와 같다.
1647년 1월 5일 (음력 1646년 12월 1일) 일식 (출처 : Google earth)
당시 일식은 한반도는 동틀 무렵에 일식이 거의 끝나가며 태양의 아래에 달이 아주 살짝 걸쳐 있는 것이 보이는 일식이었다.
1647년 1월 5일 일식 한반도 부분 확대 그림
주황색 실선이 일식의 관측 한계선이다. 일출 시에도 해가 가린 정도는 2%에 불과하므로 사실상 한반도에서는 관측하기가 힘든 일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식임에도 인조실록에는 개기일식이 있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여담이지만 이때 반대편의 일식이 끝나는 지점이 미국의 캘리포니아 지역인데 이것을 가지고 당시 조선이 캘리포니아에 있었을 것이란 상상을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
일식이 있던 12월 1일의 승정원일기를 보자.
1646년 12월 1일 승정원일기
날씨도 맑았고, 임금은 창경궁에 있었고, 다만 일식이 있는 날이므로 사헌부 등 대간이 계를 올리는 것을 정지하였다. 개기일식이 있었다고 실록에 기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비하는 아무런 행동이 없다는 것은 일식이 비록 있을 것이나 보이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 시기에는 아직 청나라로부터 일월식에 대한 자문을 받지 않던 시절이기도 하거니와 중국 대륙 자체에서는 보이지 않는 일식이므로 당시 청나라로부터 일식에 대한 어떤 정보도 받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일식은 관상감에서 자체적으로 추보하여 있을 것이라 예측했을 것이다.
이렇게 실제로는 개기일식이 아니거나, 볼 수 없는 일식임에도 실록에 '개기일식'이라는 단어를 넣은 것은 당시 인조실록을 편찬한 실록청의 편수관들이 당시의 암울한 상황을 회상하면서 넣은 일종의 정치적 도구일 수 있다. 이 병술년 12월 실록 기사 중 다음의 기사를 보면 어떠한 상황이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왕자 이징(李澂)을 숭선군(崇善君)으로 삼았는데, 징은 조 소의(趙昭儀)가 낳았다. 세자의 1녀(女)를 숙안 군주(淑安郡主)로 삼고, 모두 내지(內旨)이다. 오정위(吳挺緯)를 정언으로, 이천기(李天基)를 수찬으로 삼았다.'
- 인조실록 인조 24년 12월 25일 정유 3번째 기사
위 기사에 등장하는 왕자 이징, 숭선군은 바로 소용 조 씨의 아들이다.
드라마 '꽃들의 전쟁' 소용 조 씨
드라마 '꽃들의 전쟁'에서 배우 김현주가 분한 '얌전'이 바로 소용 조 씨다. 1646년은 소현세자의 아내인 민회빈 강 씨가 바로 이 소용 조 씨의 모함에 휘말려 사사되었고, 명장 임경업이 김자점의 모함에 휘말려 국문을 받다 목숨을 잃은 해였다. 바로 김자점과 소용 조 씨가 위세를 드러내던 해가 1646년 병술년이었던 것이다. 또한 인조실록은 인조 사망 후 효종 1년인 1650년에 편찬을 시작하여 1653년에 완성하였는데, 공교롭게도 그 사이인 1652년이 김자점과 소용 조 씨가 실각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해였다.
인조실록의 편수관의 총책임자는 이경여와 김육이었는데 김육은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돌아올 때 그를 맞이했었고, 소현세자가 사망 후 적통은 봉림대군(효종)이 아니라 소현세자의 아들인 경선군이라고 주장하였다. (경선군은 유배되어 이듬해 12세로 병사한다.)
대동법과 시헌력을 도입한 명신 김육
이경여 또한 민회빈 강 씨의 사사를 반대하다가 미움을 사 유배되어 위리안치까지 당했던 인물이다. 이렇게 실록 편찬의 책임자가 김자점과 소용 조 씨 하면 이를 바득바득 갈 분들이었으니 이들에 대하여 실록에 어떻게 기록을 남겼을지는 자명하다.
그분들의 입장에서 어둠의 무리들이 득세한 시기를 표현하기에 '개기일식'이라는 천문현상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표현하는 좋은 수단이었을 것이다. 현대에 와서 실제로 일식이 일어난 것이 아님은 들통났지만, 무슨 의미로 당시의 상황을 서술하고자 했는지는 후손으로서 충분히 느낄 만하다.
1646년의 일식이 그래도 한반도는 지나갔기에 혹시나 당시 재야의 누군가라도 일기를 썼거나 기록을 남겼거나 싶어 열심히 뒤져봤지만 없었다. 신기하게도 많은 일기나 유고(遺稿)들이 1646년 병술년 겨울에 대한 기록이 없다. 어딘가에 남아있을 1646년 병술년 12월 초하루에 쓴 문서에 이 날 일식에 대한 서술이 나타나기를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