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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전문가윤담헌 Oct 26. 2022

부분일식을 왜 개기일식이라 했을까

실록은 일기장이 아니다

 대륙에 조선이 있었고, 베이징 부근에 있는 적봉(赤峰)이라는 곳이 수도였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다. 이 적봉 수도론자들이 즐겨 언급하는 일식이 있는데 1697년 숙종 23년 윤 3월 1일의 실록 기록이다.


'개기 일식(皆旣日食)을 하였다.辛巳朔/日食旣。'

- 숙종실록 숙종 23년 윤 3월 1일 1번째 기사


 짤막하게 개기일식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당시 일식의 본그림자는 한반도를 지나가지 않았다.

1697년 4월 21일 일식도 (출처 : eclipsewise.com)

 위 그림처럼 일식의 본그림자는 베이징 부근에서 츠펑, 즉 적봉을 관통하여 지나갔다. 실록에 개기일식이 있었다고 기록한 것은 실제로 개기일식을 보았기에 기록한 것이므로 이때 조선의 수도는 적봉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인조 이후의 역사서는 실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실록에 맞물려 함께 볼 수 있는 여러 기록이 존재한다. 승정원일기, 동문휘고, 각사등록 등 온갖 외교문서와 장계 문서가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시대이다.

 동문휘고의 일월식 자문 편에는 수없이 많은 일식과 월식이 있을 것이란 청나라의 자문과 해당 일식이 예측대로 보였는지 안 보였는지를 답하는 조선 측의 자문이 실려 있다. 이런 식으로 일월식에 대한 정보의 교류가 있던 것은 원나라 때부터이다. 이후에 자세히 서술하겠지만 고려사에는 원나라에서 일식이 있을 것이라 했는데 일어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애석하게도 동문휘고에서 청나라에서 전해주는 일월식 자문은 1723년부터였기 때문에 1697년 이 날의 일식 자문은 없다.

 각사등록에도 마침 이 해 장계들이 모두 소실되어 없다. 그럼 승정원일기 하나 있는데, 사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날의 승정원일기를 보자.

출처 : 승정원일기

 이 날은 아침에 일식을 충분히 관측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식을 보았거나 하는 내용이 없다.

 당연한 것이 이 날 날씨가 음(陰), 즉 흐렸기 때문이다. 즉 이 날 궁궐에서는 일식을 관측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록에 '개기일식이 있었다'라고 써놓은 것은 바로 개기식이 있을 것이라는 청나라의 자문(咨文)이 있었거나, 관상감에서 추보한 결과 일식이 있을 것이란 보고가 올라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1697년에 일월식 자문은 확인할 수 없다 해도 특히 북경 지방을 본그림자가 관통하는 개기일식에 대하여 청나라가 조선으로 그 소식을 보내지 않았을 리가 없다.

 승정원일기에는 여기에 일식과 관련된 한 가지 기록이 더 있다. 당시 조선에서는 지방의 관아나 관찰사에게 일식 또는 월식을 실제로 관측했을 때 식심도형(食甚圖形)의 모양을 그려 중앙 정부로 보냈다.

동문휘고에 그려진 식심도형

 1697년 이 날에도 숙종은 각 지방에 일식의 도형을 바칠 것을 주문했다.

이와 관련된 기사가 있다.


'김세익이 아뢰기를, 이번 윤 3월 1일에 일식 도형(圖形)이 서울과 지방이 대체로 서로 같은데, 방금 삼가 강원 감사 유득일(兪得一)이 올린 그림의 도형(圖形)을 보니 동서로 모두 식을 그려 올렸습니다. 일식(日食)의 법은 원래 좌우에 모두 식을 하는 이치가 없는데, 이번에 그린 형체는 대단히 법을 어긴 것인데, 상세히 획급해 보지도 않고서 잘못 그려 낸 실상이 참으로 매우 놀라우니, 감사 유득일(兪得一)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니 추고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승정원일기 1697년 윤 3월 14일 15번째 기사, 번역은 한문고전 자동번역을 하여 일부 문맥에 맞게 수정했음.


 첫 문장에서 비록 궁궐이 아니었어도 한양에서 일식을 관측하여 올라온 도형이 있었는데 이것이 지방에서 올라온 것과 대체로 비슷했다는 말을 볼 수 있다.

 당연한 것이 위의 일식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한반도 전체가 0.8부터 1.0 이하의 식분 영역에 걸쳐 있기 때문에 당시 조선의 어느 곳에 있어도 경미한 차이가 있을 뿐 대체로 동일한 형태의 일식을 관측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개기일식이 있던 곳이 수도였다면 '서울과 지방의 일식 도형이 대체로 비슷하다'라는 이 말은 성립이 안 된다. 이것이 성립이 되려면 일식의 모습이 서울이나 지방 전체가 동일해야 하므로 당시 조선은 위 일식도의 본그림자의 지름 정도밖에 안 되는 한반도보다 작은 소국(小國)이 된다. 따라서 승정원일기의 기록은 조선의 수도가 츠펑이 아님을 밝히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실시간으로 기록한 일기가 아니라 그 날짜의 여러 문서들을 조합하며 때로는 사관의 의견까지 기록한 편년체 기록물이다. 유성과 같은 국지적인 성변(星變)은 실제로 보고 쓴 기록일 가능성이 높으나 그것 또한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높은 것일 뿐이다. 명 또는 청나라로부터 일월식에 대한 통보를 받던 당시에 실록에 나타나는 일식 기록은 실제로 본 것뿐 아니라 비록 실제 관측한 사실이 아니더라도 자체적으로 알았던, 통보를 받았던 그날 일식이 있다고 인식한 것까지 기록한 것이다.

 대륙조선설과 같은 유사역사학의 무차별한 공격이 현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돌아왔다는 말도 있다. 조선의 수도를 대륙으로 옮겨 보려다가 조그만 도시 국가로 전락시키는 우를 범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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