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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전문가윤담헌 Sep 22. 2023

조선왕조실록 일식 不관측 기록 정리(1) 태조~세종

한반도에서 볼 수 없었던 일식 기록들에 대한 오해와 정리

 역사 속 천문기록을 가지고 왜곡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공통된 논리를 가지고 있다. 천문 기록은 모두 실제 관측을 했기 때문에 기록된 것이고, 이것은 과학적 사실이므로 후대의 누군가가 조작을 할 수 있는 여지란 없다는 것이다. 또한 과거의 천문 관측 및 점성 행위는 지배 세력의 수장인 임금에게만 허락된 일이었으므로, 일식 중에서도 특히 개기일식이 일어났다는 기록은 바로 임금이 달의 본그림자가 지나는 바로 그곳에 있었다는 뜻이며, 이 본그림자의 경로들을 중첩하였을 때 겹치는 부분이 수도가 있었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예를 들어 아래 그림을 보자.

 위 그림은 올해인 2023년 10월과 내년인 2024년 4월에 연속으로 있을 일식의 그림자가 지나는 부분을 겹친 것이다. 서로 다른 경로의 달의 본그림자가 만나는 사각형의 지역이 있는데 이 곳은 미국 남부 텍사스 주의 샌안토니오 부근이다. 두번 째 그림의 사각형 영역에 사는 사람들은 6개월만에 두번씩이나 해가 완전히 가려진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만약 미국에서의 일식 기록이 이 두 개의 일식 기록만 남는다면 수백년 후 같은 논리로 미국의 수도는 워싱턴DC가 아니라 샌안토니오였을 것이란 주장이 나올 수 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에서 유일하게 맞는 것은 과거의 조상들은 일식, 월식과 같은 천변에 민감해서 만약 일식이 일어난다면 임금이 소복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치며 북을 두드리는 구식제(求食祭)와 같은 제사를 성대하게 지낼 정도였다는 것 뿐이다. 우선 구식제를 지냈다는 것 자체가 이들의 주장과 정면으로 맞지 않은 것이, 다가올 초하루에 일식이 생길지 안생길 지 어떻게 알고 제사를 준비했냐는 것이다.

구식제 상상도

 옛날 임금들은 모두 새 달 초하루에 언제 일어날 지 모르는 일식을, 소복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치며 해가 질 때까지 무한정 기다리고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역법의 수준이 어느 정도 올라왔을 때부터 일관들은 일식과 월식이 언제 일어날지, 어디서 일어날지 계산하여 '예측'할 수 있었다. 이것을 '추보'라고 하며 이러한 추보를 통보받으면 그 때 임금과 신하가 모여 구식제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를 판단하였다. 또한 '개기일식'일 때만 구식제를 지낸 게 아니라 '부분일식'이어도 구식제를 지냈다. 일식 기록을 조사해 보면 매우 낮은 식분으로 태양의 한 귀퉁이가 살짝 이지러져 있는 것만 보였는데구식제를 준비하지 않아 크게 난리가 났던 사실이 있다.

 따라서 역사서에 나타난 천문기록은 단순히 관측을 해서 얻은 '측후 단자'가 아니라 일관들이 추보한 기록이 혼재되어 있다. 천문 현상이 과학적 사실이기는 하나 현재의 '과학자'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실증적으로 기재하는 연구 노트가 아니어서 편찬자의 다소간의 윤색 또한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고대의 국가들은 교류 따위는 하지 않는 정적인 국가가 아니었다. 중앙과 군국 세력간의 서신의 왕래를 통하여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다른 나라의 기록이나 사서 또한 참조할 수 있었다. 천문 현상은 과학적 사실이지만 그것을 기록한 건 어디까지나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있다.

 대륙 조선설 또는 아메리카 조선설을 주장하는 분들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반복된 오류만을 되풀이한다. 그리고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영지주의, 근본주의자들처럼 조선왕조실록의 무오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따라서, 실록에 나타난 일식 기록이 한반도에서는 도저히 관측할 수 없는 일식이라면 그것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한반도에 있었던 게 아니라 당시 일식을 관측할 수 있었던 곳에 있었다고 주장하게 된다. 심지어 달의 그림자가 지나간 곳이 오직 남극 대륙이어도 말이다. '조선 중종이 남극에서 일식을 보았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런데 그들은 받아들인다.

 그러나 조선시대를 살다 간 우리 조상님들은 하도 기록을 자세하게 남겨서 대륙 또는 아메리카 조선을 주장하는 분들이 근거로 드는 일식 기록에 대해 모두 반박할 수 있게끔 만들어 놓으셨다. 이 분들에겐 조선의 임금과 일관 그리고 선비들은 모두 일제가 만든 반도사관에 찌든 식민사학자들이다.

 그럼 조선왕조실록에 존재하는 한반도에서 볼 수 없는 일식 기록들의 사정을 들여다 보자.


1. 태조2년 7월 1일 - 1393. 8. 8. - 잘못된 국역으로 인한 오해

 태조 2년에 기록된 일식 내용이다. 일식이 있어 해가 보이지 아니하였다라는 국역은 잘못된 해석이다. 日食不見은 그냥 일식이 보이지 않았다로 해석해야 한다. 바로 뒤에 일관의 일식추보에 대한 의견이 있는데

일식이 있긴 하지만, 일몰 시에 일어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실제로 그랬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혹시나 해가 지기 전에 일식이 있을지도 모르니 소복을 입고 기다리고 있다가 무사히 해가 졌고, 여기서 釋은 '풀 석' 자인데 '풀다, 해석했다'라고 하기 보다는 여러 뜻 중에 '의심을 놓다'로 의역할 수 있고, 다른 음으로는 '기뻐할 역' 자이기도 해서 일몰내석(日沒乃釋)은 해가 지자 기뻐하며 의심을 놓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해당 날짜의 일식은 서울에서 봤을 때 정확히 지평선 아래에서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대륙조선설을 주장하시는 분들께서는 '일식이 있어 해가 보이지 아니하였다'는 국역만 읽고 아니 일식이 있었다고 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었는데? 그러니 더 서쪽인 중국 대륙에서 본 것이 아니냐고 해석을 와전시킨다. 일단 국역 자체가 틀려서 오역 신고를 해야 하거니와 설령 그렇게 읽는다 쳐도 일식이 있다는 말은 관측한 게 아니라 추보, 즉 예측했다는 말이다. 바로 뒤 일관의 설명을 덧붙인 것과 태조 임금이 어찌 하였다는 것을 깡그리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일식이 있어 해가 보이지 않은 게 아니라 일식이 있는 시간에 해가 보이지 않았다, 즉 해가 지고나서 일식이 생겼다는 지적을 국사편찬 위원회에 건의한 결과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고쳐진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오해가 사라지기를 바란다.


2. 세종 11년 8월 1일 - 1429.8.30


'일식하였다.

임금이 소복(素服) 차림으로 근정전의 영외(楹外)에 거둥하여 의식(儀式)대로 일식을 구하였다.

먹구름 때문에 〈일식의 상태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해당 일식의 그림자는 한반도를 지나가지 않았다.

 잘못된 예측으로 구식제까지 준비했으나 구름으로 인해 일식을 볼 수 없었다. 당시 일관들에겐 행운일 뿐이다. 만약 날씨가 맑아서 일식이 생기지 않는 사건이 벌어진다면 목을 씻고 기다려야 하는 중죄였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구식제를 거행했다는 것은 일관들의 '추보'가 있었다는 뜻이고, 기상으로 인해 관측을 하지 못한 이상 위 그림에 해당되는 영역이 조선의 세력권이라는 근거 자체가 안되는 기록이다.

 

3. 세종 15년 6월 1일 - 1433. 6. 17.


'일식하였다.'


 이 날은 간단하게 일식하였다는 말만 기재되어 있다. 당시 달의 그림자는 아래와 같이 아시아 지역과는 상관 없는 아메리카와 유럽, 아프리카 일부 지역을 지나갔다.

 따라서, 이 그림만 놓고 보면 어떻게 보지 않고 기록을 할 수 있느냐는 주장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날 세종은 이조, 예조, 병조, 전의감과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더욱이 바로 전날인 음력 5월 29일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삭제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했다.'


 삭제는 통상적으로 초하루 때 거행하던 제사이다. 구식제가 아닌 삭제 준비를 한 것이다. 일식이 있던 초하루임에도 일식과 무관한 생활을 한 것이다.

 이것은 굳이 기록에 없다고 해도, 당시 세종과 신하들은 일식의 추보를 들었지만 관측할 수 없을 것이란 것도 알았기에 아무런 액션 없이 평상시와 같은 일상을 보낸 것이라 쉽게 추리할 수 있다. 대개 '일식', '일유식지'라는 기록만 기재된 일식의 경우가 이런데, 구식제를 준비했다는 내용은 없고 일상 그대로 보낸다던가, 기껏해야 목욕 재계를 하고 상참, 경연 등은 중지하는 정도의 최소한의 준비 행동만 있을 뿐이다.


4. 세종 18년 4월 1일 - 1436. 4. 16.


'일식하였다.'

 달의 그림자가 북극 및 북아메리카, 북유럽 지역을 지나간 일식이다. 이 날 또한 일식이라고만 기재되어 있고 어떠한 액션도 보이지 않을 뿐더러 전날까지 임영대군(세종의 4남)의 집에서 거처하다가 이 날 환궁하였다. 일식이 있는데 구식제나 재계는 커녕 아들 집에 있었던 것이다.


5. 세종 19년 3월 1일 - 1437. 4. 5.


'일식하였다.'

 마찬가지로 일식하였다는 기록만 있다. 같은 날 기록에는 정상적인 업무 기록이 있고 전날인 2월 30일에는


'삭제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1433년의 기록과 같은 케이스이다.


6. 세종 21년 8월 1일 - 1439. 9. 8.


'일식하였다.'

 일식이라고만 기재되어 있다. 역시 전날인 음력 7월 29일 삭제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고 한다. 특히 다음날인 8월 2일에 중요한 기사가 있다.


 '......  「중국에서는 해가 밤에 먹히는 것과 달이 낮에 먹히는 것은 천하(天下)에 포고(布告)하지 않는다.」 하고, 또 《교식통궤(交食通軌)》에 이르기를, 「일식이 야각(夜刻)에 있는 것과 월식이 주각(晝刻)에 있는 것은 곧 먹히지 않는 것과 같으니, 반드시 추산(推算)할 것도 없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지하(地下)에서 먹히는 것도 또한 조시(朝市)를 정지하면, 이것은 예(禮)로서 무거(無據)한 것이고 지나친 것이다.’

...... 의정부에서 여러 사람이 의논하고 아뢰기를, "태양이 밤에 먹히는 것과 태음이 낮에 먹히는 것을 미리 중외(中外)에 고하는 것은 우리 나라의 이미 이루어진 법이오니, 비록 중국에서 행하는 것은 아니라도, 이것은 하늘을 삼가고 재앙을 두려워하는 뜻이오니, 어찌 의리에 해로울 것이 있습니까. 신 등은 생각하옵건대 예전대로 하는 것이 편할까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지금까지 밤에 일어나는 일식(지하(地下)일식)과 낮에 일어나는 월식도 보고하였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자는 내용이다. 이러한 물음과 대답은 전날의 일식이 밤에 일어나는 지하일식이었기 때문에 이 지하일식에도 구식(求食)을 해야 되냐는 데에서 출발하였다.

 이렇게 전후 맥락과 사정을 헤아려서 이해하지 않고 단순히 '일식'이란 글자만 보고 조선의 영역에 대한 허황된 주장을 한다면 그저 '인문학적 소양의 결여'라고 밖에는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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