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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사이 Aug 11. 2024

이별 이야기

스쳐간 나의 식물들


“한 번도 정성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왜 죽지? 죽은 건 니가 너무 약해서야.. “

“꽤 식물을 잘 키운다고 자신하는데 왜 죽냐고? 죽은 건 다 니 탓이라고! “


새로운 환경을 만나 고군분투하며 적응해 가는 시기에 나를 위한 식물들을 집안으로 들여놓았다.

초록의 식물은 까맣게 탄 마음을 초록으로 만들어줄 것이고, 화사한 꽃은 다운된 기분을 업 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받기만 하려고 했다.

오만과 편견에 싸인 나는 식물이 하는 진심의 말을 듣지 않았고, 식물 탓을 했으며 그 시기에 가장 많은 식물들이 희생되었다.

내 마음속 혼란과 산만스러움, 무신경함이 분명한 이별의 원인이다.

식물이 하나씩 죽을 때마다 나를 돌아보게 되었고, 나의 소홀을 의식하게 되며 정신이 차려졌다.

마치 식물들은 나의 근심과 걱정을 조금씩 나누어 거둬가듯이 내 곁에 잠시 머물고 떠나갔다.

많은 식물들과 이별한 후에서야 안정이 찾아왔다.

살아남은 식물들에게..

살아남은 나에게..


조금만 방심하면 식물은 내게 원망을 하진 않지만 단박에 이별을 고한다.

지금도 이별을 하자고 하는 위기의 두 식물이 있다.

아직 키우는 법을 잘 알지 못하는 칼란테아진저와 블루바드..

지난봄 정신없이 지낼 때 신경을 못써주어 토라진 것 같다. 뒤늦게 정성을 들이지만 미래를 알 수 없다.

두 식물을 위해 위기의 여름이 끝나고, 빨리 가을이 왔으면 좋겠다.


신기한 것은 식물이 살도록 정성을 다할 때 비로소 나도 살 수 있었다.

식물과 나는 위태로울 때 함께 위험했고, 둘 다 잘 지낼 때 함께 안정적이었다.

힘들 때 더욱 식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정성을 기울이면 말없는 식물에게서 언제나 현명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수많은 식물과의 이별을 통해 알게 된 식물과 함께 살려고 하는 나의 이유란 것을 깨닫는다.


나는 좋은데 너는 손해인 것은
상대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이 복은 오래 지속이 안 돼요.
너한테는 좋은데 내가 희생하면
내가 오래 참지 못해요.
나도 좋고 너도 좋아야 합니다.
이것이 지속가능한 행복을
만드는 길입니다.

- 법륜스님의 희망편지 중 발췌 -


스쳐간 나의 식물들에게..

사진으로 남은 식물은 극히 일부이다.

사진으로도 남지 못한 식물들을 기억하며 식물들의 소리를 듣지 못했음에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움을 전한다.




라넌큘러스

프리지아와 종이꽃을 사던 날 그냥 주신 시든 라넌큘러스가 예쁘게 꽃을 피워 잘 살 줄 알았다.

진딧물에 시달리다가 여름날의 가지치기로 이별함


종이꽃 (계란꽃)

계란처럼 생긴 예쁜 꽃이 만지만 바스락바스락 얇은 종잇장 같은 소리가 났었다.

해가 뜨겁던 날 물말림으로 이별..


녹보수? 해피트리?

키울 줄도 몰랐으며 끝내 정확한 이름을 모른 채 이별..


임파첸스 (서양 봉선화)

오랜 그리움 끝에 만난 임파첸스는 모종 한판을 사서 여기저기 나눔을 했다.

우리 집에 남은 임파첸스는 과습으로 인해 이별..


꽃치자 나무

싱싱하고 푸릇한 잎

아름다웠던 개화

우아한 향기를 남기고 이별..


허브

무럭무럭 잘 자라다가 여름철 관리에 소홀하여 이름표 없이 구분이 가능해진 어느 날 이별..

로즈마리, 스피아민트, 쵸코민트, 오데코롱민트, 애플민트, 페퍼민트


송엽국

예쁜 송엽국은 항아리집에서 사 왔었다.

과습으로 인해 이별..


고추나무

사은품으로 와서 테이크 아웃 컵 속에서 두 해를 살고 이별..


돌나물과 미나리

먹거리 장바구니에서 살아나 기쁨을 주고 이별..


카네이션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잘라서 삽목을 해보다가 이별..


불로초

꽃꽂이 화병 속에서 뿌리를 내려 흙에 심어주니 새 순이 나와 다시 꽃이 피었다.

흰 가루병이 심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별..


나의 옥탑 화단

사진처럼 흐릿한 기억 속의 몇 년간 즐거웠던 작은 화단의 식물들..

화단을 철거해야 방수공사를 할 수 있다며 방수공사를 하지 않으면 일이 생겼을 때 책임을 모두 떠안으라고 했다.

“할 수 없지.. 철거해야지 뭐...”

화단을 가꾸기 힘들었던 나의 핑계로 이별했다.

사랑초와 프리지아
작은 화단의 봄엔 프리지아, 가을엔 코스모스..
한포기 딸기의 질긴 생명력은 온 화단을 뒤덮었다.
작지만 수확의 기쁨
가을에 심어 월동후 봄에 피어난 자색 튜울립


그리고..


청양 (흰색 아젤리아)

반려식물이었던 아름다운 청양..

26년을 살고 떠났다. 정말 고마웠어..





연재북 <아는 식물> 5화. 청양 이야기

연재북 <아는 식물> 9화. 임파첸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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