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베이비시터 4. (완결)
어쩌다 베이비시터 4.
그사이 예지는 내 마음에 들어와 있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예지 생각을 했고, 우리가 무엇을 했고 얼마나 귀여운 아기인지 가족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남편이 말을 했다.
“애들 어릴 때 쌀, 보리하고 놀아주면 좋아하더라. 예지랑 한번 해봐”
예지는 손이 잡히는 것을 조금 무서워했지만 정말 까르르 웃으며 좋아했다.
그렇다.
세상의 중심에 우리의 사랑스러운 아이가 있고, 아이가 아프면 함께 울고, 아이가 웃으면 행복했던 우리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그사이 아기 예지는 우리의 마음에 들어와 딱딱하게 굳은 마음을 살살 풀어주고 있었다.
내가 육아를 할 때 영혼 없는 교과서 같은 지침서 외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육아 서적이 없었다. 오은영 선생님도 없었다.
누구에게도 배운 적이 없는데 나에겐 철칙이 있었다.
1. 세 살까지는 꼭 곁에 있어줘야겠다. 2. 맘껏 뛰어놀도록 해야겠다.
사촌들과 골목 여기저기를 놀이터 삼아 뛰어놀았고, 언제나 곁엔 엄마나 이모, 외할머니가 계셨다.
언제나 즐겁고 재밌었다. 온전한 아이로서의 기억이다.
어렴풋한 안심되는 좋았음의 기억이 몸에 새겨져 비롯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년도로 따지면 연년생인 23개월 차이인 내 아이들의 3살 이전 일과는 이러했다.
아침 식사 - 놀이터 - 목욕 -점심 식사 - 낮잠 - 놀이터 - 간식 - 놀이터 - 목욕 - 저녁 식사 - 책 세권 읽어주기 - 취침.
남편은 새벽에 나가 다음날로 넘어가야 들어오니 완전한 독박육아를 했다. 시간차이로 어떤 때는 며칠 동안 아이들이 아빠를 만나지 못했다.
물론 운 좋게도 내가 전업주부였으니 가능했지만 온통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생활은 어른스러운 대화가 고프고 몸이 힘들었다.
그러나 나의 어린 시절처럼 때에 딱 들어맞게 아이들이 아이다운 온전한 기억을 갖게 하고 싶었다.
육아기간 중 가장 중요했고, 단 한 점의 후회도 없는 시간이었다.
예지는 밖으로 나가는 것보다 집안에서 자기만의 안전한 공간에서 놀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나 역시도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주 신경 쓰이고,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노력하는 좋은 부모였지만 학업을 병행하는 지친 부부가 번거롭고 체력을 요하는 집 밖의 놀이를 자주 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하얀 피부의 예지가 집 밖의 놀이에 대한 경험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예지의 동네엔 걸어서 갈만한 마땅한 놀이터가 없었다. 그래도 밖으로 나갔다.
놀이터가 없어도 바깥세상은 온통 아이들의 신기한 놀이터다.
우린 동네를 걸으며 산책을 시작했다.
피어있는 꽃과 나뭇잎을 보여주고 날아다니는 나비와 땅바닥의 개미, 햇빛에 반짝거리는 거미줄에 매달려있는 거미도 보여줬다.
“더러워! 만지면 안 돼!” 예쁜 나뭇잎을 주워서 주니 예지가 그렇게 말했다.
“그렇구나. 알려줘서 고마워. 집에 가서 이모가 깨끗이 손을 씻을게. “
무엇도 억지로 하게 하진 않았고, 매일 잠시라도 산책을 나가 자연스러운 밖의 세상을 보여줬다.
예지는 모든 것을 두려워했지만 산책을 즐거워했고, 핏기 없이 하얗던 얼굴이 가무스름 해지며 생기가 돌았다.
그날은 조금 쌀쌀하고 단풍나무 씨앗이 바람에 팔랑팔랑 날리던 예쁜 가을날이었다.
예지가 단풍잎을 손에 들고, 뛰다가 넘어졌다. 그런데 울지 않고, 더럽다고 질색하던 땅바닥에 가만히 엎드려있었다.
“이모, 개미다!”
나는 사실 다쳤으면 어쩌나 싶어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얼른 일으켜 손바닥과 무릎을 털어주고 어디에도 상처가 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장갑을 끼우고, 긴 바지를 입힌 것이 다행이었다.
“많이 아팠을 텐데 우리 예지가 울지도 않고, 정말 씩씩하구나 “ 호들갑스럽게 칭찬해 주었다.
일어선 예지는 놓친 단풍잎을 주워 호호 불더니 다시 걷기 시작했다.
땅바닥의 개미를 반가워하고, 나뭇잎을 더러워하지 않고 예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흐뭇했다.
그리고,
첫날에 내 손 안에서 쏙 빠져 달아났던 예지의 작은 손이 먼저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그날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우리는 손을 꼭 잡고 걸었다. 그 작은 손의 따뜻함에 울컥해지며 내 마음이 따뜻했다.
예지와의 긴장관계가 부드러워지니 어느 날은 숨기지 못한 내 답답한 한숨이 삐져나왔다. 예지가 물었다.
“이모 오늘 왜 뚱한 표정이에요? 어디 아파요? “ 하며 작은 손으로 내 이마를 짚어본다.
“응? 이모가 그랬어? 아닌데.. “
예지가 소꿉놀이 접시에 맛있는 것을 하나 가득 올려 나에게 주었다.
“이모, 맛있게 먹어요”
세상에나 예지가 나를 위로해주려 한다. 하마터면 눈물이 왈칵 나올 뻔했다.
하지만 나는 베이비시터니까 이후 나는 다시 긴장하며 언제나 밝은 표정으로 예지를 대했다.
예지네 집은 계약기간이 다 되자 우리 집과 차로 5분이면 닿는 거리로 이사를 했다.
나는 기름값을 걱정하지 않고, 더 부담 없이 예지에게 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경제적인 상황은 더욱 악화됐고, 막바지를 치닫고 있었다.
“우리 돌아가자”
“그래. 우리 이제 그만하고, 돌아가자! “
누가 먼저랄 것 없는 한마음으로 결정하고 나니 후련했다. 귀국이 결정되고 빠르게 제일 싼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아, 예지... 어쩌지?‘
귀국 50일 정도를 앞두고 그만두겠다는 말을 전하니 예지 엄마가 말했다.
“걱정이 있으셨군요. 언젠가 예지가 이모가 아픈 것 같았다고 말하더라고요”
내 모습을 마음에 담아두고 엄마에게 전했던 것이다.
베이비 시터를 바꿔야 하는 예지의 앞일을 걱정하니 더 이상 시터를 두지 않고, 부부가 돌보고 있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 해엔 정규 학습과정으로 들어가는 킨더가튼에 보내기로 했다고 한다. 왠지 안심이 되었다.
“부모지만 예지와 지내는 일이 너무 힘들었는데 이젠 저희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며칠 뒤 엄마에게 얘기를 들은 예지가 내게 말을 했다.
“이모, 한국에 왜 가요? 안 가고 예지랑 놀면 안 돼요?”
“왜 냐고? “ 예지가 내게 이유를 물었다.
나는 어린 예지와 알아들을 수 있는 선에서 솔직한 얘기들을 하며 지내는 사이가 됐지만 귀국의 이유를 어찌 말해야 할지 몰랐다.
“한국에 이모의 엄마가 계시거든.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한국에 가는 거야.”
그러자 예지가 더 묻지 않고, 말없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이해하는 것 같았다.
언젠가 가시 돋친 말로 들렸던 ”왜 “ 란 말이 이렇게 다정한 말이었던가?
마지막 날.
예지는 평소와 다르지 않게 보였다. 소꿉놀이를 하고 산책을 했다.
평소와 달리 아빠가 아닌 예지 엄마가 돌아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예지야, 이모에게 인사해야지”
..........
마치 첫날 같았다.
“예지야, 건강하게 잘 지내야 해 “라고 말하고 꼭 안아주었다.
갑자기 예지가 첫날처럼 서럽게 울었다.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이 아니고, 나 때문에 예지가 엉엉 운다.
나는 결국 마지막 날에도 예지를 울리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첫날 같은 울음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고,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
‘우리의 생각은 맞는 걸까?’
떠나기 일주일 전 전화가 왔다.
“이모님, 곧 귀국하시겠네요. 제 마음 같으면 안 가셨으면 좋겠어요.”
그 말이 참 고마웠다.
“이모님을 만나 예지가 완전히 달라졌고, 저희가 아이 돌보는 일이 덜 힘들어졌어요. 정말 감사했습니다. “
나와 젊은 부모 그리고 예지.
우리는 서로 위하는 마음을 나누며 함께 성장했고, 친구가 되었다.
뭉클한 감동을 받으며 우리의 갑을관계가 끝났다. 어쩌면 이미 오래전 우리 관계의 의미는 변해 있었던 것 같다.
세 살짜리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은 참 어려웠고, 처음 느끼는 귀한 감정을 경험했다.
내 꼬마친구 예지.
“예지야, 안녕.....”
어쩌다 베이비시터 그 후.
낯선 사람과 단둘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어색하고 불편하다.
그 어려운 처음의 순간을 잘 다독이며 둥글둥글 동그랗게 만들려고 애쓰다 보면 관계가 의미 있어진다.
마음을 터놓는 절친이 되고, 애인이 되고, 부부가 되고, 고부간이 친구가 되고, 영혼의 단짝이 되듯이
나이,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와도 친밀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예지가 성장했고, 젊은 부부에게 평화가 찾아왔다.
예지와 지낸 순수한 시간으로 인해 마음이 평온해진 나의 생각도 차분하고 또렷해졌다.
나와 남편. 우리는 미련하게 이고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훌훌 털어내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됐다.
어쩌다가 하게 된 2년 정도의 베이비시터 일은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가져왔다.
사람과의 관계란 마음을 움직이는 영향력을 지녔다.
관계의 불편함과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나를 포함한 서로의 노력에 따라 영향력의 양이 정해진다는 것을.
그때 예지가 세 살이었으니 지금은 스므살이 갓 넘은 꽃 같은 청년이 되었겠다.
가끔씩 예지가 어떻게 자랐을지 궁금하다.
사진 한 장 없이 예지의 모습은 내 기억으로만 저장되어 있지만 유니콘만큼이나 또렷이 기억난다.
어른이 된 예지를 길에서 만나면 알아볼 수 있을 것만 같다.
가을 단풍잎을 보면 내 손을 꼭 잡아주던 예지의 작은 손이 생각난다.
고마웠어..
나의 예지야, 안녕!
The end.
예지야, 안녕! (어쩌다 베이비시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