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을 하다 우연히 세 번 만나면 우리는 친구가 될까?

자꾸 마주칠 땐 먼저 인사를 건네기. 묘한 기류가 생긴 독일 남자

by 반하의 수필


방에 있는 것이 지겨워 일단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갈지 몰라 마을을 정처 없이 떠돌다 저녁 햇살이 비치는 쪽으로 걷다 보니 반대편에서 낯익은 학생 두 명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덩치 큰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었다. 남자의 핑크색 비니와 헤드셋을 보니 금요일 오전의 수채화 수업을 함께 듣는 아이들이었다. 남자는 그 수업을 들어도 되는 지 모르겠다는 나의 하소연에 해도 된다고 대꾸해준 친구였고 여자는 내게 수채화용 펜을 어디에서 사면 되는 지 알려줬었다. 우리의 걸음이 살짝 늦어졌지만 인사를 하지는 않았다. 나는 용기가 없었고 그들은 내가 누군지 긴가민가하는 것 같았다. 살짝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들의 고개도 나를 향해 있었지만 도로 가던 길을 걸았다. 우리의 거리가 자그마한 들판을 사이에 둘 만큼 멀어졌을 때 다시 한번 멈춰서서 서로를 보았다. 갸우뚱하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이날 친구 은주는, 자신의 버디가 쓰지 않는 자전거를 줬다고 했다. 산책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날이 이미 어두웠기 때문에 자전거 한 대를 끌고 버스 정류장에 도착할 은주를 마중나갔다. 자전거는 은주가 기대한 바구니가 달린 자전거가 아니라 허리를 살짝 숙이고 타는, 안장이 높은 자전거였다. 우리가 그 자전거를 차례로 타보며 기숙사로 걸어오던 중 또 다시 산책할 때 본 아이들이 보였다. 아직도 걷고 있는 듯 했다. 어두웠지만 가로등 때문인지 그들도 나를 본 것 같았고 몇번 서로를 힐끗 거리며 지나쳤다. 이번에는 인사를 했어야 하는데, 또다시 놓친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은주와 나는 새 자전거에게 화가의 이름을 따 ‘달리’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기숙사 지하에 세워두었다.


지하에서 계단을 따라 밖으로 나왔을 때 슈테 근처에 있는 그 아이들이 또 보였다. 거리가 아주 가까운 건 아니었지만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헬로”라고 인사했다. 즉각 가까이로 온 그들은 내게 금요일 수업을 듣는 사람이 맞냐 물었고, 내 정체를 확인한 그들은 놀라고 기쁜 표정을 지었고, 여러 차례 마주치며 자신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 지 말했다. 같은 수업을 듣는 아이가 맞는가? 왜 멈춰 섰지? 걔가 맞다면 금요일 수업이 교실이 아니라 호수에서 만나는 거라고 알려줘야 하는데! 이런 생각과 함께, 여자아이는 금요일에 자기가 호수로 안 가고 교실에 가서 나를 기다려야 하나 고민했다고 한다. 그런 다정한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은 금새 말랑말랑해졌고 쉽게 인사를 하지 못하는 그들이 나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다시 외웠고 은주도 자신을 소개했다. 빈티지 가죽 자켓에 통이 넓은 바지를 입은 여자는 아나벨, 큰 덩치에 분홍색 비니를 쓴 남자는 큐였다. 큐는 자신이 누드스케치 수업을 하고 왔다며, 방금 그린 두 장의 스케치를 보여줬다. 누드로 누워있는 중년 남성의 형태였다. 교수님도 젊고 자유로운 분위기이고 무척 재미있다고 너희도 오고 싶으면 오라고 말했다. 누드스케치라니! 그 단어를 들었을 때부터 내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 찼다. 영화나 책에서만 보던 일을 직접 해볼 수 있다니 무조건 당연히 찬성이었다. 잔뜩 신이 난 우리의 반응을 본 큐는 다음 주 월요일에 연필과 스케치북만 챙겨서 오면 된다고 했고, 원한다면 모델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학생 중에 모델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큐의 말은 장난이었지만, 나는 “Oh, why not?”이라고 답했다. 교환학생을 시작한 지 한달도 되지 않은 내게 이곳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경험은 ‘Why not! 해보지 뭐!’였다.


큐는 지난 금요일 수업에서 내가 그린 그림을 언급하며, 자신은 그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그때의 초라함을 떠올린 난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도 안 되니 놀리지 말라고 반응했지만 그는 재차 괜찮았다는 말을 했다. 독일에 온 지 30일이 되었는데 아직 맥주도 마시지 않았고 슈테도 가보지 않았다고 아쉬운 듯 말하니, 큐는 “가면 되지, 지금 갈래?”라고 말하며 우리를 이끌었다. 여전히 기숙사 4번 건물 앞에 서 있었고 그것은 슈테의 코앞이었기에 나는 걸을 틈도 없이 슈테 안에 도착했다. 고대하던 그곳은 생각보다 사람이 많고 시끄러웠다. 북적 북적한 사람들과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큐는 나와 은주의 맥주를 사줬다. 그는 슈테가 음악은 이야기하기에 너무 시끄럽고 조명은 춤을 추기에 너무 밝아서 바보같다고 했다. 아나벨도 큐와 마찬가지로 슈테를 싫어했다. 아무튼 그들은 우리를 위해 와줬고 나는 시끄러운 음악과 밝은 조명 아래, 얻어마시는 맥주 한병을 들고 사람들 사이에 낑겨있듯 서 있는 그 순간을 즐겼다. 서로의 귀에 가까이 가야만 목소리가 들렸기에 난 가까이 서 있던 큐와, 은주는 아나벨과 이야기를 나눴다. 큐는 힙합 춤을 추는 댄서였다. 춤도 추고 여러 일을 하다가 이 교육 대학에는 늦은 나이에 입학했으며, 그래서 나보다 한 살 많은 아나벨과 달리 큐는 다섯살이 많았다. 그가 전공하는 과목은 미술과 철학이었다. 어떻게 골랐냐고 물으니 미술과 철학만이 정확히 맞고 틀리다는 답이 없고, 아이들이 스스로 설명하는 대로 다 맞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게 좋다고 했다. 그는 한쪽 발목에 커다란 깁스를 하고 있었는데 댄스 배틀을 하다가 발목이 꺽였는데도 무리해서 춤을 이어갔기 때문이라고 했다. 원래 이름은 큐린인데, 발음이 어려우니 그냥 큐라고 했다. 내 머릿속에 그에게 할 질문들이 쉽게 떠올랐다. 나도 그가 던지는 질문들에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었고 그는 잘 들었다. 그는 곧잘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그의 유쾌한 말씨에 나도 크게 웃었다. 철학, 춤, 미술, 선생님이라니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산만한 덩치 때문에 훨씬 올려다봐야 한다는 것도 신났다. 디제잉을 하기도 하는 그는 내가 파티에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고 하자 말도 안 된다는 듯, 이틀 뒤에 있을 학교의 오프닝 파티에 꼭 가라고 했다. 날 신기하게 쳐다보는 그에에 한국에는 파티 문화가 없다고 변명했다. 은주는 애나벨과 간간히 말을 하고 있었고 서로의 대화를 따라가기에는 음악이 너무 컸다. 큐와의 재미에 푹 빠져 친구는 신경도 쓰지 않는 내게, 은주는 아나벨과 큐가 친구사이라는 입모양을 보냈다. 금요일 수업의 왓츠앱 그룹에 초대해주기 위해 내 번호를 저장하던 그는 내 이름 뒤에 어떤 이모지를 붙일 지 물었다. 나는 그에게 Hari (곰), 그는 나에게 ‘Q(나무)’로 저장 되었다. 나무는 그의 댄스팀 이름이라고 한다. 그가 기억력이 나빠 거의 모든 사람을 그런 식으로 저장한다는 걸 알았지만, 성을 빼고 이모티콘과 함께 저장되다니 무슨 사이라도 된 것 같았다. 맥주 한병을 다 마셔가자 말을 하는 와중에도 내 몸이 이쪽 저쪽으로 흔들렸고 그때마다 그는 내 어깨 아래를 잡아주었다. 밖으로 나갈 때는 벽에 기대 서있는 내 코를 손가락으로 톡 치고 갔다. 내가 말을 할 때마다 웃는게 그 애의 눈동자 속에서 내가 점점 귀여워지는 것 같았다. 어느새 큐가 댄스 수업에서 본 섬세한 근육을 가진 축구하는 남자애보다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은주가 화장실에 간다고 할 때 실은 나도 화장실에 가고 싶었지만 가지 않았다. 맥주와 사람들 속에서 따뜻해진 몸과 친밀한 그의 시선, 코 끝에 맴도는 차가운 공기가 즐거웠다. 왠지 영어도 술술 잘 나오는 기분. 은주가 돌아오자 나는 큐에게 “집에 가도 돼.(You can go home now)"라고 꽤 무례하게 말했고, 그는 너무하다는 제스쳐를 했다. 내일 전시에서 보자고 인사하며 그가 멀어졌다. 은주는 우리 둘이 케미가 좋았다며 웃었다. 현서와 은주의 카톡방이 나와 큐의 이야기로 달궈졌고 난 취한 글씨로 대화들을 마구 일기장에 적은 후 조금 신이 난 채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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