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공원 데이트
이후 얼마동안 큐는 내게 친하고 다정하게 굴었다. 그 애는 내게 누드스케치 교실을 알려줬고, 미술실에서 하는 안전교육에 신청하라고 알려줬다. 덕분에 미술실에서 스케치북을 직접 만들기도 하고 도자기실에 찾아가기도 했다. 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며 우연히 큐의 친구들을 만났고 학생회였던 큐와 아나벨, 그 친구들 덕에 다양한 미술 학부의 행사에 쉽게 참여했다. 덕분에 그가 있는 수채화 수업이나 누드 스케치 수업에 가는 것도 신나고 재밌었다. 번역체인 한국어로 뭐 하냐는 메시지를 보내는 그가 부담스럽지 않고 웃겨서, 그의 집에 초대를 받았을 때도 잔뜩 용기를 내서 찾아갔다. 대마도 담배도 술도 하지 않고 아늑한 소파에서 수다를 떨고 초코볼을 던지면서 놀았다. 혼자 가기 무서워서 은주도 불렀는데 은주는 큐와 내가 노는 모습이 마치 장난기 많은 오빠와 여동생 같은데 귀엽다고 했다. 큐는 은주에 대해 엄마를 부르는 거냐고 했고. 그때는 플리마켓을 가서 구경을 하다가도 그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재미있는 모양의 장난감이나 특이한 패턴의 빈티지 넥타이가 눈에 들어왔다.
당시 슈투트가르트는 봄 축제 시즌이었고, 큐는 그곳에서 다트를 던져서 인형을 받을 수 있는 부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친구들과 축제를 구경하러 간 나는 일부러 그 애의 부스 앞을 지났다. 큐는 내게 다트를 한번 던져 보라고 하더니 잘하지 못했는데도 상품으로 보이는 빨간 장미꽃을 건넸다. 꽃을 받고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가방에 꽃을 꽂아 놓고 축제를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 애의 부스 앞에 있는 롤러코스터를 탔을 때는 왠지 그 애의 시선이 느껴져 소리를 지를 때 입을 벌리지도 않았다. 역시나 곧 그에게서 잔뜩 확대해 롤러코스터 위에 있는 내 모습을 찍은 사진이 왔다. 친구는 장미꽃은 사랑의 의미가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었고 나는 그저 부끄럽고 신나는 마음이었다. 큐는 밤 11시가 되어야 퇴근을 했기 때문에 나는 친구들과 음식도 먹고 사진도 찍으며 축제를 즐겼다. 저녁 시간이 되자 큐에게 메시지가 왔다. 밤 9시에 퇴근을 하게 되었으니 놀자는 이야기였다. 데이트 같았다. 우리는 커다란 관람차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가 보이지 않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내 앞에 커다란 그가 나타났다. 우리는 그네 같은 것에 앉아 높은 곳에서 빙글빙글 도는 놀이기구를 탔고 거울 미로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곳에서 가장 무서워 보이는 놀이기구를 타고 싶다고 그 앞에 간 내게 큐는 단호하게 말했다. “난 죽을 거야. 난 못 타. 타지 말자.” 몇 번 더 조르다가 포기하고 그 자리를 지나자 그는 갑자기 놀이기구 앞으로 돌아가서 그 높은 기구 위를 몇 번 쳐다봤다. 그러더니 비장한, 그러나 여전히 무지 겁먹은 표정으로 그것을 타자고 했다. 나는 됐다며 반대편으로 그를 이끌었지만 그는 버티고 서서 이건 네게 한 번밖에 없는 봄 축제일 텐데, 자기 때문에 놓치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고 정말 그가 머리가 아파질까 봐 걱정이 되어 절대로 타지 말자고 했고, 대신 덜 무서운 롤러코스터를 한번 더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열차에 타고 있고 그 애는 노트에서 펜을 꺼내며 시계를 본다. “10분. 충분해.” 그리고 바쁘게 나와 종이로 시선을 옮기 겼다. 그려지는 건 여러 번 시선으로 훑어지는 거였다. 그때 나는 그가 나를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멀리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빠지지 않았고 그는 나에게 빠지지 않았는데, 내가 적극적으로 굴면 금세 우리가 뭐라도 되어 버릴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더 나는 다정하기보다는 새침하게 굴었고 인사로 하는 굿바이 허그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먼저 연락을 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그의 흥미를 떨어뜨렸는지, 애초에 그의 마음을 내가 오해했던 건지 그날 이후 그는 수업에서 보아도 내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가 그로부터 조금 후에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굉장히 불편하고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연애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호들갑을 떨었고 잠시 설레했지만 그는 빠르게 내 일상에서 사라졌다. 먼저 인사를 건네도 무심하게 반응하는 그가 미웠고 수업에 가는 것도 불편해졌지만 그가 재밌는 날을 하루라도 만들어줬고, 내게 많은 기회를 소개해 줬던 것까지 욕할 수는 없었다. 열 번 울었던 것보다 한번 진심으로 웃었던 것이 늘 더 소중하다.
아무튼 이 모든 일의 시작은 혼자 나간 산책. 우연히 만난 아이들. 세 번을 마주치고서야 인사를 건넨 나. 내일도 열심히 나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