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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어 보았습니다

- 곽재구 <꽃으로 엮은 방패>, 오은 <없음의 대명사>를 읽고

by 준 원 규 수

곽재구 <꽃으로 엮은 방패>, 창비, 2021년

오 은 <없음의 대명사>, 문학과지성사, 2023년



시를 읽는 건, 힘들다.

어려서는 시 속의 낭만적인 표현들이 좋았고, 사랑의 감정을 담은 시구들에 설렜었다.

하지만 어느 책이건 읽다보면 깊어지고, 깊어지면 익숙해질 만한데

시는 읽으면 읽을 수록 어려웠다.

하지만 천천히, 일부러 읽는 속도를 늦추며 글자에 담긴 의미들을

그 안에 담긴 생각과 감정들을 생각하는 시간은

무척이나

좋다.


- 좋은데 나는 왜 이 시집들을 2,3년씩 책장에 구겨 놓았을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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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은의 <없음의 대명사>


우선 제목들이 무척이나 흔한 듯 특이한데

'그것', '그것들', '그곳', '이곳', '우리', '나', '너'

모두 대명사이다.

같은 대명사가 여러 편의 제목으로 쓰였는데 연작시는 아니다.


제목이 대명사이다보니 시를 읽으며

좀더 상상하게 되고, 좀더 나를 대입해 보게 된다.


-전략-
그것 참 신기하구나 그것 참 다행이구나 그것 참 부드럽구나...... 나는 이불 속으로, 꿈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여름밤에 내리던 것이 겨울밤에 쌓이고 있었다
-'그것'중에서
-전략- 일주일에 한 번 모여 네 명의 그는 그들이 되었다 그들이 아닌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카푸치노 한 잔, 얼그레이 한 잔을 준비한다 이처엄 그들은 한결같이 입맛이 다르다 취미도, 성적 취향도, 정치적 입장도 다를지 모른다 네 명의 그가 그들로 있는 시간은 고작 30분, 사이좋을 시간도 미래를 설계할 시간도 없다 쌍꺼풀이 있어 부럽다는 얘기도, 시력이 나빠 렌즈를 낄 수 없다는 얘기도 할 겨를이 없다 그들은 다음 주 목요일 저녁7시에 여기서 또 모일 것이다 가장 먼저 오는 그가 네 명 몫의 음료를 주문하고 계산할 것이다 내가 머그잔을 세 개, 유리잔을 하나 꺼내는 동안 먼저 온 그는 그들이 될 준비를 할 것이다 -하략-
-'그들'중에서 -
혼자 있고 싶을 때는
화장실에 갔다

-중략-

혼자인데
화장실인데

내 앞에서도
노력하지 않으면 웃을 수 없었다
-'나'중에서-

중반 이후부터는 산문시가 많이 나오는데, 그 시들은 단편영화 같기도 하고, 소설의 한 대목 같기도 했다.


시는 어렵지만 곰곰이 되새기며 내가 반추동물이 된 것처럼 우물우물

시의 표현들을 되씹으며 맛을 느끼게 되는데

이 시집은 수수께끼를 푸는 마음도 들어서 뭐랄까.....베라의 슈팅스타처럼

머릿 속에서 뭔가 터지는 그 느낌이 좋기도 했다.


곽재구의 <꽃으로 엮은 방패>


표지가 예뻤다. 그래서 산 것 같다.


곽재구 시인의 시는 서정적이고, 흙냄새가 나도록 향토적이다.

또, 따뜻하다.

누군들 아는가?
고등어가 한손으로 팔리는 건
살아서 파랗던 그리움의 날들
세월이 흘러 썩어 문드러질지 모를 외로움의 날들
달래주기 위한 떠돌이의 생선 장수의 마음 씀임을
퀭한 누두덩 아래 잠시 머문
촉촉하고 뿌연 외로운 불의 물임을
- '화진포' 중에서

시의 소재들도 모두 소박하다. 오랑캐꽃, 못이 박히 자리, 민들레, 칡꽃처럼 화려하지 않고 흠이 있거나

목도장, 파르티잔스크, 우슈토베, 중강진, 북간도, 용오름마을처럼 민족, 역사, 민중과 어울리는 장소들에 대해 노래한다.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것들,

봐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것들에 대해 조곤조곤 말해주는 그 목소리는 잔잔하고

부당한 것, 옳지 못한 것에 대해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지나치지 않고, 거칠지 않지만 단단한 옹이 위에 슬며시 고개를 내미는 봄날의 여린 가지 같다.


그 잔잔하면서도 단단한 서정이 마음에 들어와 음미할 만큼의 평안이 내게 부족한 시간이 길어지다보니

눈에 보이는 자리에 시집을 꽂아두고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 곽재구 같은 시인들은 더 힘들고 아프지 않았을까.....


류시화 시인은 이렇게 혐오가 넘치는 세상 속에서 시를 계속 써도 되는지 고민하는 내용의 시를 썼던데...



-생략-
염소가 왔다
염소에게 첫 장이 없는 시집을 준다

염소는 시집을 먹으며 웃는다
시집을 열심히 먹으면 언젠가 자신도
종이배가 되어 강을 따라 흐를까 생각한다

종이배와 염소가 있으니
시인은 새 시집 읽는 게 두렵지 않다
- '늙은 시인은 새 시집 읽는 게 두렵지 않다' 중에서

어쩌면 시인들처럼 타인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앓아내고

세상의 슬픔을 자신의 눈물로 씻어 내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기에

'희망'이라는 것이 어두운 세상에서도 계속 샘 솟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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