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 Nov 20. 2024

작은 몸집의 위대한 영혼이 내게 물었다.

* 이 글은 1달만에 도시생활을 접고 양평으로 이주한 저의 시골생활을 듬성듬성 적어내려 가는 연재브런치북입니다. 헌집과 헌나를 변신시키는 과정을 담아냅니다.


일요일!

굉장히 신나는 날이다!

여기 시골에 와 '무조건 외출'을 해야만 하는 날.

집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이지만

일요일의 외출은 나를 흥분시킨다!!


평소대로 일요일도 새벽독서와 코칭이 이어지지만 끝나자마자 서둘러 채비하고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읍내로 나가 7시 40분 버스를 타야 8시 30분 미사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편의점 아메리카노로 카페인을 주입하고 조용히 성당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는다.


고백하건데 나는 천주교신자이나 성경도 잘 모르고 사실 신앙심도 깊지 않다. 하지만 매주 일요일 미사만큼은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매주 주어지는 '미사' 1시간여를 통해 나는 나를 반추하는 이 시간이 너무 좋은 것이다. 게다가 여기 성당은 병인박해 이후 숨어든 순교자들에 의해 처음 천주교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천주교 순례 사적지 가운데 한 곳이라 성당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뭐랄까...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이 느껴진다. 



미사가 끝나자마자 나는 곧바로 바로 옆에 있는 도서관으로 향한다. 집중해서 글쓰는 시간이다. 미사중에 마음속 분심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나 스스로가 지닌 다양한 사고들이 재정렬되면서 동시에 진입한 찰나의 영감이 혼합된다. 그리고 그것들이 내게서 분출되려는 엄청난 압력은 내 두다리를  빠르게 움직이게 한다. 마음이 급하다. 휘발되기 전에 얼른 쓰고 싶어서. 그렇게 걸음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도서관에 들어서자마자 써내려가는 글은 진솔과 진정이 듬뿍 담긴, 내 글이 아니라 '글이 내 손을 움직이는' 에피파니로 날 전율케 한다. 

도서관안에서

이 전율에 이미 나는 중독되었다. 

쓰려 해서 쓰는 것이 아닌, 왜곡된 시선을 바로 잡으려 애쓰지 않아도 내가 지니고 있는 기형적인 개념, 가벼운 지식, 바늘구멍보다 더 작은 시선으로 조악스럽게 인지했던 현상들이 빠르게 찾아온 영감과 함께 자기들이 낚아챈 단어들 속에서 나의 '악한 시선'을 배제한 곳에 '순수'를 입혀준다. 

그렇게 초집중의 두어시간을 보내고 나면 뱃속에서 꼬르륵꼬르륵 신호를 보낸다. 

자기도 봐달라며.


국밥 말고는 달리 먹고 싶은 게 없는 나지만 요기거리로 대충 배속만 달랜 채 버스시간 놓치지 않으려 또 빠른 걸음으로 버스를 타고 읍내로 와 자전거에 오른다. 그렇게 내리 달려 집으로 오는 동안 난 들떠 있다. '오늘은 또 어떤 놀이가 날 기다릴까?'


써야할 글도 다 썼고, 

조악스러웠던 내 정신이 충분히 영혼에 세척된 느낌까지 보태어져 

'이제 놀아야지!'하며 내게 자유를 허락하는 시간이다.


집에 오자마자 내가 좋아하는 8090발라드부터 집 전체가 울리도록 커다랗게 틀고는 마당에서 뒷짐지고 걷기도, 돌을 뽑아내기도, 나무들이 제 맘대로 씨앗을 뿌려 싹튼 아가나무들을 모종삽으로 파내어 적당한 자리로 옮겨주기도 하며 어슬렁거린다. 힘을 좀 써야겠다 싶으면 집밖 근처를 돌며 장작이 될만한 나무를 질질 끌고와 장작도 만든다. 

해먹에 누워...

이렇게 다소 쌀쌀한 날씨에도 온몸이 땀에 흥건해지면 해먹에 누워 하늘을 본다. 내 시야에 담기는 것이라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그 사이를 유유하고 진짜 멋지게 나는 매 두마리, 낮은 하늘에서 어디론가 이동하는 까마귀떼들, 이름모를 작은 새들, 그리고 낙엽떨군 벗나무 가지가 전부다. 


그렇게 나만의 상념에 빠질 때쯤  

'내가 의도하지 않은', 

'그러나, 차츰 기대를 주는' 재미들이 날 찾아온다.


딱딱딱딱!!

딱딱딱딱!!

딱따구리가 나타났다!

소리가 크게 들리는 걸 보니 아주 가까운 곳이다. 

눈을 감고 귀에 집중하면 그 소리가 어디쯤인지 대충 감이 온다.

바로 위다!


가지 사이를 유심히 바라보니 아주 작은, 그러니까 내 엄지손가락 2배정도의 흰몸에 까만줄인지, 까만몸에 흰줄인지 온몸에 멋진 흑백의 스트라이프 무늬를 가진 딱따구리가 열심히 나무를 쪼아댄다. 우리나라의 텃새로 불리는 쇠딱따구리치고는 하얀데? 그렇다면 이 녀석은 쇠오색딱따구리인가?  

나뭇가지 위 딱따구리, 화면을 당겨서 찍었더니 화질이 영..ㅠ.ㅠ

이 녀석은 나의 후련한 일요일 오후를 어찌 알았는지 자기와 놀자한다. 

그런데 이 녀석. 

아주 염치가 없다. 


내가 자기보다 훨씬 고등한 인간이고, 

내 덩치가 자기보다 수백배 크고,

내 사유가 자기보다 무한대로 어마무시할텐데

한 인간이 사유에 빠져 있는 이 시간을 아무런 양해없이 딱딱대며 방해하고 있다. 


마치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딱딱딱딱, 나무쪼는 일만이 지구를 구해낼 유일한 일인 것마냥, 딱따구리 세계의 대변자로서 자기가 지금 나무를 쪼아대지 않으면 자신들의 세계가 치명적인 오류에 빠질 것이라는 착각에라도 빠진 듯.


쪼아대기만 한다. 

여기를 쪼다가 안되면 저기를 쪼고 저기가 아니면 다시 조금 아래로, 그래도 안되면 옆의 나뭇가지로 옮겨서 계속 쪼아댄다. 그렇게 쪼아대기만 한다.


아... 요 녀석...

기어이 날 일어나게 하는구나.

무거운 다리를 해먹에서 내리고 요 녀석을 더 관찰하기 위해 나는 있는 힘껏 까치발을 뜨고 거기에 남은 힘 모두 보태 힘껏 팔을 뻗어 녀석을 핸드폰 화면에 담으려 애쓴다. 그렇게 사진과 영상을 찍어 아이들에게 '엄마 딱따구리랑 논다!'하며 '또 조잡한' 자랑거리 하나 만들려는 내 머리 위에서 녀석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렇게 십수분. 아주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내 귀에는 마당에 쩌렁쩌렁 울리는 8090의 발라드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고

내 사유가 어디서 멈췄는지도 까맣게 잊었고

내 다리가 무거운지, 팔이 아픈지조차 감각을 잃었다.



크기나 위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고등하다고 뻐긴 것도, 내가 덩치크다고 잰것도, 내 지식이 자기보다 어마무시하다고 잘난체한 모든 것이 녀석의 '초집중'. 그저 나는 내 할일이나 하련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나무를 쪼는 것뿐. 결과가 안나와도 나는 그저 내 할일만 할 뿐이라는 위대한 정신을 만난 것이다. 순간 나는 작아졌다. 위대한 영혼을 소유한 작은 몸집의 몸짓에 내 안에선 절로 감탄이 솟는다.  


아차.....

긴팔 뻗어 사진으로 녀석의 모습만 담을 게 아니라

그 위대한 정신을 내 정신에 담기 위해 이성의 더듬이를 뻗어 올려야 했다.


'아... 그런 것이지... 자연은, 본능은, 그저 자기 자리에서 오늘, 지금 해야할 것을 할뿐이지. 천적이 오면 피하여 하고, 결과가 나지 않아도 다시 하고, 이 자리에서 안되면 다른 자리에서 하고, 방해하는 녀석이 출동하면 잠시 쉬었다가 또 하고. 그런거지.'


나는 가끔이 아니라 자주 실망한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왜 결과가 나지 않지? 하면서.

결과는 나의 몫이 아니다. 

결과를 아는 것은 결과자체만이 안다.

연약한 정신이 내리는 판단이 결과를 평가하게 해서는 안된다.

결과의 시기와 모양, 크기는 결과의 속성에 담겨 자체의 길끝에 드러난다.

그저 나는 깨어있는 정신으로 결과를 위해 오늘 내가 해야 할 몫만을 해낼뿐이다.

그저 오늘은 결과로 가는 과정의 일부일 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쌓아가는 이 하나하나가 '결과가 가는 길'임을 '믿고' '하는 것'이다.


자연은 우연이다. '자연을 따르는'연구는 내가 보기에는 예속, 약함, 숙명론을 드러내는 어떤 나쁜 징후이다. 사소한 사실들 앞에서 맥을 못 추게 된다는 것은 전체 예술가들의 체면을 깎는 짓이다. 있는 대로 본다는 것은 다른 종류의 정신에 속한다. 즉 반(反)예술적이고, 사실주의적인 정신에 속한다. 인간은 인간이 누구인지 알아야만 한다(주).


내가 우연에 맥을 못추며 예술가들의 체면을 깍는 짓을 하는지도 모르지만 

이 작은 영혼은 자기 앞의 인간에게 당당하게 묻는 것에 나는 답을 찾아야 한다.


작은 몸집의 위대한 영혼은 내게 물었다.

오늘 네가 해야할 일은 제대로 마쳤는가?

오늘 네가 걸었던 길은 네 길이 맞는가?

오늘 네가 농축시킨 시간의 맛은 어떠한가?

이렇게 작은 나도 내 할일을 모두 끝내고서야 잠으로 들어가는데 인간인 너는 나에게 떳떳한가?


그리고도...

이 위대한 영혼의 질문은 끝이 없이 이어졌다....


주> 니체, 우상의 황혼, 부북스


[건율원 ]

https://guhnyulwon.liveklass.com


[지담북살롱]

책, 글, 코칭으로 함께 하는 놀이터,

https://cafe.naver.com/joowonw


[지담연재]

월 5:00a.m. [감정의 반전]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5:00a.m. [나는 시골로 갑니다.]

목 5:00a.m. [Encore! '엄마의 유산']

금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토 5:00a.m. [지담과 제노아가 함께 쓰는 '성공']

일 5:00a.m.  [나는 시골로 갑니다.]






이전 15화 집으로 가는 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