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거진 [익숙한 명제의 재해석]은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관념에 대해 지담이 '이건 아닐걸?' 의문과
반박을 하는 것입니다. 그저 저의 사고수준이 여기까지인지라 너그러이 여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좋은 것을 갖고 싶어하고 선한 마음으로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불행, 슬픔, 거짓, 위선, 억울, 불평, 불만, 시기, 질투... 많은 부정적인 요소들도 지니고 산다.
이러한 부정요소가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부정상황에 부정감정이 날 자극하면 주변에서 이리 말한다.
'뭐든 긍정적으로 생각해!'
'액땜했다 여겨!'라고.
과연 그럴까?
안좋은 일을 좋은 식으로 해석한다는 건 뭘까?
슬픈데 슬퍼하지 않으려면 어찌 해야 할까?
불안한데 불안에 떨지 않으려면?
화가 나는데 좋게 생각하려면?
천사의 능력을 인간인 나에게 강요하는 것은 이제 그만.
나는 그저 인간인지라 '사고의 동물' 인간답게 정리해보려 한다.
안좋은 일, 즉 부정을 긍정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해석'의 관점, 이성의 영역으로 옮겨야 한다.
부정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라고 할 때 '생각'하라는 것, 즉, 이성적으로 따져보라는 것이지 단지 '좋게 느끼라'는 감정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정을 겪으면 이를 단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거야. 나는 괜찮아. 다들 이렇게 사는데 뭘'과 같이 여기는 것은 '부정'의 모습으로 온 그것에 대한 '외면'이거나 '회피'이거나 '방관'일 수 있다.
하지만
부정을 '인과'로, 즉 이성으로 따져보면 어떨까? 무언가를 먼저 받은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계산서를 나중에 치르는 것). 또는 다가올 어떤 것에 대해 미리 대가를 치르는 것(미리 계산부터 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상당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활동이다.
삶의 기본 원리는 '인과'다. 어떤 사태든 이유없이 드러나는 법은 없다. '이유', 즉, 무엇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든, 무엇을 위하여 드러나든. 즉, 먼저 드러나든 나중에 드러나든 지금 발생한 부정은 지난 일에 대한 결과이며 앞으로 올 일에 대한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과로 해석한다면 지금 일어난 부정은 말 그대로 '긍정'을 위한 원인이기도,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부정을 단지 '좋게' 여기는 것은 '회피'요, '감정'으로 다루는 것이라면
부정을 인과로 '해석'하는 것은 '이해'요, '이성'으로 다루는 것이다.
부정 역시 내 인생에 살짝 끼어들어서 뭔가 일을 하기 위해 내게로 온 것이다.
미운 모습으로 왔다고 하더라도 나를 거쳐 가야 할 이유가 있어 내게로 온 것이다.
따라서,
부정 역시 내게 스쳐가야 할, 나에게 뭔가 남겨야 할 이유를 지니고 내게 온 것이기에
내 삶에 필.요.한. 긍정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단 하나의 공식이 만들어질 수 있다.
부정+긍정=초긍정.
삶의 모든 순간순간은 다 이유가 있어서
무엇으로 말미암든, 무엇을 말미암으려 하든
내게로 온 것이니
모두 나를 위해 필요한 것이 제때 제자리에 온 것이구나. 라는 해석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긍정적으로 생각해라'의 참의미가 아닐까.
무슨 일에든 웃고
무엇이든 수용하고
어떤 사태에도 밝고
어떤 것에라도 참는 사람.
참 '착한'사람이다.
하지만 '바른'자세는 아닐 지 모른다.
부정을 '외면'한 긍정의 태도는 '착한'사람일지는 모르나
이는 '부정'을 회피한 것이기에 또 하나의 계산서를 쌓는 더 부정적인 삶으로 자신을 이끄는 것이며
부정을 '해석'한 긍정의 태도는 '착한'사람으로 보일 뿐 아니라
치를(또는 앞으로 치를) 계산서를 치르는 안정된 삶으로 자신을 이끄는 것이다.
따라서, 또 하나의 명제를 거론할 수 있겠다.
착한 사람은 바르지 않을 수 있으나
바른 사람은 항상 착한사람이다.
성인들의 가르침으로 말하건데,
어떤 부정의 사태 앞에서 감정을 달래기 위해, 애써 외면하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말라. 이유있어 온 그것이 외면당한다면 이유를 보태기 위해서라도 더 자신에게 달라붙으려 한다. 그 것이 당신의 삶을 거쳐가야할 필연의 이유를 가졌기에 어떻게든 몸집을 더 크고 강하게 불려서라도 더 달라붙어 버린다.
하지만,
현명한 사람이라면 부정이 온 것에 감사하고 혹여나 계산하지 못한 이유들까지 찾아 당겨서 당당하게 치러낸다. 고통스럽지만 부정을 더 자신의 삶에 바짝 당겨안은 채 시간을 더 치열하게 보냄으로써 다가올 긍정을 오히려 앞당긴다.
이러한 삶의 자세에 대해 결론적으로 소로우는 '우리는 죽을 때까지 높은데 있음으로써 낮은 지대에서 일어날 지 모르는 모든 재난을 피할 수 있다'는 말로 함축했고 릴케는 로뎅의 삶을 탐구한 후 '그 분에게 미치는 방해물들이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갔음을 알려줬다. 우리의 삶도 이래야 할 것이다. 매번 울고 속상하고 화나고 복수심에 불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모든 이유'에 대해 '이해'하고 '수용'하고 '계산'함으로써 높은 곳에서 삶의 방해물들이 스스로 나를 거쳐 속도내어 지나가게 하는 삶으로 나의 삶을 이끌어야 할 것이다. 부정없는 삶은 없으니 피할 수 없는 것은 피하지 못한다.
* 위의 글에 도움이 될 아래의 글을 참조하세요.
https://brunch.co.kr/@fd2810bf17474ff/264
* 헨리데이빗소로우, 소로우의일기, 1996, 도솔
* 라이너마리아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2003, 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