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에 대한 단편, 욕망에 굴복하느냐, 극복하느냐 - (1)
시간이 지나며 우리는 노쇠해져 결국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결국 생을 마감하게 된다. 죽음이 우리를 찾아온다는 것은 낮이 지나면 밤이 온다는 사실보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찾아온다는 것보다도 확실하기 마련이라, 반드시 건강할 때 최대한 잘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건강할 때는 그 건강이 영원할 것이라 여겨 시간을 낭비하는 경우가 대다수라 정말 애석할 따름이다. 올바르다고 생각했지만 잘못된 행복을 추구할 경우,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영원불멸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시간을 얼마나 낭비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면 뼈아픈 손실을 느낄 것이다. 특히 우리는 어릴 적에 그 낭비가 극에 달하는데, 젊을 때는 내 창창한 체력이 평생 지속할 것만 같아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대개 눈앞에 보이는 쾌락을 좇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어떤 친구들은 내일 죽으면 오늘 놀지 못한 것이 후회되니 내일을 죽을 사람처럼 오늘을 보내는데 이는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사람은 내일 죽을지 오늘 죽을지 모르는 것은 맞지만, 내일 죽을까 두려워 오늘을 허투르게 보냈는데 내일 죽지 않는다면 그 내일은 어떻게 보내야 할까. 그러다 더 이상 놀 수 없을 때가 되었을 때는 과감히 생을 마감하기라도 할 것인가.
모든 사람은 젊었을 적에 자신의 외모나 체력이 영원히 지속되는 줄 알고 착각해 외적인 것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넘쳐흐르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일을 벌이며 세상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의 비극이 싹트는데, 우리가 막 학교를 벗어나 이 사회에 발을 디뎠을 때, 바로 그때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각자의 진로를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이 사회가 어떻게 막 돼먹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로 말이다. 평생 먹고살아야 하는 재주를 가장 어리석을 때 결정해야 하는 현실은 어찌 보면 비참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젊을 때는 이러한 현실을 눈치채지도 못한 채 무한이 끓어오르는 것만 같은 자신의 힘을 믿고 일에 부딪힌다. 그렇게 몇몇 운이 좋은 사람들은 올바른 길을 가지만 불행하게도 운이 좋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한 길에 회의감과 후회를 느끼고야 만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영원히 피는 꽃은 존재하지 않듯 젊음은 시들어버리고 체력은 바닥나고 꽃다운 얼굴에는 주름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사람은 일반적으로 나이를 먹음에 따라 자기가 직접 경험한 것으로부터 배우며 성장해나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의 경우 세월이 지나도 똑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성적으로 따져보고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가 기분 내키는 대로 어렸을 적에 그랬듯 그냥 그렇게 사는 사람들도 많다. 행복이란 육체에 매달릴수록 비참하게 되어가기 마련이다. 이 말은 동물의 삶과 인간의 삶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기 마련이고, 우리는 사람이기에 동물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동물의 삶이란 무엇일까? 육체에 굴복하는 삶이지 않을까? 배고프면 먹을거리를 찾아 먹고, 자고 싶으면 좋은 자리에 누워 자고, 짝짓기를 하고 싶으면 마음 내키는 대로 짝을 찾아다니고, 고통을 참을 줄 모르는 습성을 보이는 경우처럼 원초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하지만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 육체의 욕망이 일어나면 그 즉시 자신의 욕망을 따라 생각을 거치지 않고, 설령 생각한다고 해도 합리화뿐인 망상을 하고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 말이다. 누군가는 그들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가식 없다고 여길지 모르겠으나, 그들을 과연 욕망에 충실하다고 보아야 할까. 아니면 욕망에 굴복한 존재라고 보아야 할까.
사람에게 있어 육체의 욕망이란 간사한 존재라 끊임없이 솟아나게 되어있다. 아침에 일어나 배가 고파서 밥을 먹으면 식욕이 채워지는 것 같은데 또다시 식욕이 몰려와 점심을 먹어야 한다. 저녁에 충분히 잔 것 같은데도 점심을 먹고 나면 또다시 수면욕이 샘솟기 마련이다. 특히나 우리의 힘이 왕성할 어릴 때에는 그 욕망이 쉴 틈 없이 샘솟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것에 굴복하고야 만다. 그리고 어렸을 적에 굴복한 사람은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도 대개는 이 버릇을 고치지 못한다. 배가 고프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이성을 만나고 싶어서 만난다면 그건 동물의 삶과 다를 것이 뭐가 있을까. 이건 욕망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욕망에 굴복했다고 봐야 한다. 배가 고파도 건강을 위해 조금만 먹거나 몸에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이 사람다운 선택 아닐까? 졸리다고 가서 자는 게 아니라 졸음을 참고 내가 해야 할 무언가 일을 하는 게 더 보람찬 일이 아닐까? 이성을 만나고 싶어도 아무나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있는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 나갈 사람을 찾는 게 발전적이지 않을까? 그렇게 형태를 변화하며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욕망에 굴복하기보다는 내가 욕망을 지배하는 것이 더 사람다운 삶이지 않을까.
사람은 짐승과는 다른 존재다. 사람에게는 정신과 이성이라는 특별한 능력이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 특별한 능력을 포기하고 다시 짐승의 삶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사람들은 항상 겉으로는 무언가를 원하고 바라고 열망하지만 그 속에 근본 된 문제는 공허함이다. 근본적 문제인 정신의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아 끝없이 무언가를 원해 하염없이 솟아오르는 욕망조차 조절하지 못할 때, 그런 사람이 이성을 가졌다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일시적으로 만족시켜봤자 밑 빠진 독에 물 붙기라고 생각한다. 또 다시 솟아오르는 허영에 자신을 맞길 테니까. 결국 절제 없이 눈앞에 보이는 쾌락과 욕망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행위는 자기에게 충실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굴복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욕망을 통제하며 자기를 억제하라는 말은 아니다. 무엇이든지 정도라는 것이 있으니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절제해야 할 때 절제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보다는 절제하지 않아도 될 때 절제하여 생기는 문제가 더 작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