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19.
교실 뒤쪽 벽에 전지 사이즈로 출력해서 붙여 둔 시가 부적처럼 일년 내내 붙어 있다. 정현종의 시, ‘방문객’이다. 마음이 흔들릴 때 시를 보며 내 중심을 잡기 위한 것이지만 아이들의 삶도 시가 가리키는 대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어있다. 시와 함께 있으면서 좋은 기운을 받는다고 믿는다.
시인은 우리 삶에 찾아오는 모든 인연을 방문객이라고 부른다. 그 사람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함께 짊어지고 오는 우주같은 존재이다. 과거에 받았던 상처로 지금은 부서지기 쉬운 마음을 가졌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아마 바람은 그 마음을 헤아릴 테지만, 시인은 바람이 될 수는 없어 바람의 흉내라도 내면서 환대하리라 마음먹는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기에 우리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필요하다. 마음이 흔들릴 때 이 시를 본다. 시 앞에 서 있는 나를 본다.
H를 만난 것은 H가 3학년 때의 일이다. H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하고 자살을 시도하다가 하반신 마비가 되어 따로 살고 있다고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서 크고 있는 H는 옷을 자주 빨아 입지 않아 지저분했고 아이들이 싫어하는 행동을 일부러 했지만 악의는 없는 아이였다. 아이들하고 친해지고 싶은데 마음과 달리 그렇게 밉상 짓만 골라하니 친구가 있을 리 만무했다. H와 같이 잘 다니면서 언니처럼 돌봐준다는 친구를 선생님들이 일부러 매년 붙여 줄 정도였다. H는 친구들과 위기를 몇 번 겪었지만 본성은 착해서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여름방학을 며칠 앞두고 H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전화해 보니 할머니는 어머니가 데려갔다고만 하셨다. 어머니와 어렵게 통화했는데 갈라지는 음성에 발음도 불분명하시고 “H는 못 가, 안 가!”소리만 하셨다. “어머니, H 좀 바꿔 주세요. 통화만 할게요.” 하면 단번에 전화를 끊으셔서 아이가 잘 지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신변이 걱정된 나는 교장선생님과 H 할머니한테 상황을 알렸다. 그리고 H가 돌아오지 않은 채 불안한 여름방학을 맞았다.
방학을 시작하고 며칠 후 우리 학교 복지담당 선생님이 지역아동복지센터 선생님들과 함께 H를 찾으러 엄마가 사는 경기도 양주로 간다고 하셨다. 그날 아침 출발하는 봉고차에 몸을 싣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교직 경력만 믿는 우스운 교사였을 것이다.
주소를 받아 들고 우리가 도착한 오피스텔은 아무도 없었는데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전동휠체어가 작은 방안을 누비고 다녔는지 도저히 신발을 벗고 들어갈 수 없이 끈끈하고 불결한 상태였다. 동네 사람들이 그날 새벽에 H의 어머니가 욕창이 심해져서 구급차에 실려 갔다고 하는데 아이가 당최 보이지 않았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초조해서 건물을 나와 주변을 서성거렸다.
바람 한 점 없이 무더운 양주의 한낮, 저 멀리서 H가 아이스바를 빨며 “선생니~임!” 부르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며칠을 못 씻어서 꾀죄죄한 몰골로 슬리퍼를 직직 끌며. 그것은 내 인생에서 몇 안 되는, 나를 바꾼 결정적인 장면이다. 냄새가 지독한 H를 대충 씻기고 가지고 간 옷으로 갈아입혀서 무사히 차에 태워 돌아왔다. 어머니가 계셨으면 큰 싸움이 될 것 같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갔었는데 예상외로 손쉬운 구출이었다. 우리는 학교 앞 전골집에서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나는 H를 양주에서 그렇게 만났던 이후로 아이들을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달았다. 아이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자랐는지, 어떤 고단함이 있는지, 나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음을 H가 가르쳐 주었다. 아이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온다. 아이들과 내가 함께 있는 동안 그 마음을 내가 더듬어 볼 수 있기를, 그런 바람을 흉내 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여름 양주의 기억을, 지금은 중학생이 되었을 H는 잊었을지 몰라도 나는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시는 H가 내게 남기고 간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