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21.
등교일이다. 1교시에 우리가 같이 읽었던, 루리의 '긴긴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감상문을 썼다. 책을 읽으면서 매 챕터마다 줄거리를 요약하지만 감상문을 쓸 때는 그것을 다시 한 두 줄로 줄여 보라고 한다. '인물'과 '배경'은 책 읽는 시작 지점에서 금방 찾을 수 있지만 '사건'은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큰 줄기를 찾는 일이기 때문에 다 읽고 난 후에 가능하다.
내가 하는 일은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발표하도록 기다리는 것이다. 교실에 컴퓨터 화면을 띄워 놓고 아이들이 발표하는 것을 들리는 대로 타자를 친다. 아이들은 여러 가지 단어를 넣었다가 빼고 고치기를 반복하더니 결국 '소중한 이를 잃은 코뿔소 노든이 버려진 알을 깨고 나온 펭귄과 함께 서로의 바다를 찾아가는 이야기'로 합의를 보았다. 훌륭했다. 아이들도 자기들의 합작품에 만족스러워하는 눈치다.
이어서 좋아하는 장면이나 문장을 발표하는 시간이다. 조용한 여학생 하나가 손을 들더니 조심스럽게 말한 문장은,
"나는 코뿔소지 펭귄이 아니라고"(94쪽)
노든의 말이다. 호수를 만난 아기 펭귄은 노든의 뿔을 잡고 물속에서 첫 잠수를 시도한다. 물속에서 더 오래 버티고 싶었던 펭귄은 노든이 물 밖으로 나오자 더 참아 보라고 다그친다. 그러자 노든이 무안해하며 "나는 코뿔소지 펭귄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문장을 뽑은 이유를 물어보니 그냥 그렇게 말하는 노든이 좋았단다. 우리는 잠시 그 장면에 머물렀다. 이 문장의 어떤 점이 좋았을까.
코뿔소 노든은 펭귄을 위해 숨을 참고 물속에서 더 오래 버텨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코뿔소이지 펭귄이 아니라고 말하는 노든의 말에는 내 존재를 그대로 인정해 달라는 당당함이 있다. 한참 교우관계에 예민한 여학생들에겐 어떤 울림이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친구와 같이 있으면서 내 존재가 작아지는 것 같을 때,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지 않을 때, 나를 돌보지 않고 친구들과의 관계에 에너지를 쏟고 있을 때 그런 관계는 좋은 관계가 아닐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로 인정해 주는 친구를 찾아라. 찾기 어려우면 나부터 그런 사람이 되어 주면 어떻겠니.
그 외에도 아이들이 뽑은 문장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가
서로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다 대단한 일인지"(94쪽)
"노든, 나는 누구예요?"
"너는 너지." (98쪽)
부분을 골랐다. 열세 살의 언어로 왜 이 문장이 와닿았는지 조리 있게 설명하긴 힘들어도 우리가 그 부분을 함께 읽고 잠시 멈추면 고요한 가운데 떠오르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을 같이 느끼고 대화를 나누는 순간이 나는 좋다.
아이들이 돌아간 후 제출한 감상문을 읽었다. 아이들의 눈을 통해 책을 한 번 더 읽게 되는 이 순간도 나는 사랑한다. "이 책에서는 좋아하는 문장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문장보다 장면이 먼저 떠오르는 책이다."라든지, "바람처럼 빨리 달리고 싶어 하던 코뿔소 앙가부의 죽음을 보고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라는 문장을 보니 역시 나 혼자 읽기엔 아까운 글들이 많다. 내일 감상문을 발표하는 시간을 잠깐 가져야겠다. 아이들은 그런 시간도 좋아한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의 진심에 귀를 기울이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