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아, 그 매월 적립해준다는...?"
"응. 한 달에 60만원씩 적립해주니, 총 720만원이거든."
희철의 질문에 현아가 다시 한번 코이카의 국내 정착 지원금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퇴직금과 비슷하기도 하고 군인 적금과 비슷하기도 했다. 희철이도 군 복무하는 동안, 기숙의 강요로 인해 반강제로 적금을 들었고, 천 만원이 넘는 돈이 통장에 있다. 희철 명의의 이 적금 통장은 기숙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엄연하게 희철이 사용할 수 있는 돈은 아니었다.
희철은 재수 기숙학원이나 종합학원이라도 등록했으면 했지만, 기숙은 그것만큼은 결사반대하고 나섰다. 기숙은 군인 적금은 오직 '대학 등록금'으로만 써야한다는 확고한 고집이 있었다. 나라를 지키며 번 돈을 헛되이 쓰지 말고 학비로 사용하라는 뜻이었지만, 어차피 학교를 끝까지 다닐 생각이 없었던 희철은 등록금으로 내는 게 더 돈을 날리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갈등으로 희철은 이번 1학기에 복학을 하지 않고, 집에서 인강을 들으며 공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경차 사려고. 중고로는 충분히 살 수 있어. 지방에서 강사일을 하는데 차는 필수지. 그 동안은 버스로 대학교나 센터를 다니니까 너무 불편했어."
"나는 한국에 예금으로 묶어두고 온 돈이 있거든. 합치면 괜찮은 오피스텔을 얻어 독립할 수 있을 거야."
지연과 현아가 앞다투어 계획을 말했다. 두 사람은 오너 드라이버의 꿈, 독립의 꿈에 젖어 무척이나 행복해보였다.
"나는 증권계좌를 만들어서 S&P 500 지수에 몽땅 투자할거야. 한국에서 필요한 건 또 다시 벌어서 쓰면 되니까."
다솜의 계획은 언니들보다도 더 미래지향적이었다.
"뭐 주식? 정말 열정 만수르답다. 나중에 진짜 만수르되는거 아니야?"
"그나저나 수희 언니는?"
당찬 투자 계획을 밝힌 다솜은 질문을 던져놓고 정작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않은 수희에게 물었다.
"음.. 나는 엄마드려야할 것 같아. 오랜 빚이 있는데 이 참에 좀 갚아드리려고. 나도 조금씩 생활비를 드리긴 했는데, 목돈으로 한번 갚아드려야할 것 같아."
"이야, 대단하다. 언니는 정말 효녀야. 요즘에 언니 같은 딸이 어딨어."
"맞아, 내가 언니 같은 딸 낳으면 업고 다닐거야."
"큭큭. 니들이 그렇게 말해주니 위로가 된다."
수희는 엄마를 도와준다는 보람도 있었지만, 내심 동생들처럼 마음껏 돈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 속상했던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희철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제대 후, 기숙과 몇날며칠을 싸웠던 일을 떠올렸다.
- 내가 번 돈이잖아! 재종(재수종합학원)에 내가 등록하겠다고!
- 너가 재수할 때 재종가고 삼수할 때 기숙학원갔잖아. 근데 성적이 하나도 안올랐었잖니? 왜 또 엄한데 그 큰돈을 쓰겠다는거야? 그건 그냥 버리는 돈이야. 엄마는 너 수능 다시 보는 거 반대다. 하지만 네가 기어이 또 봐야겠다면 동네 도서관 다니며 공부해. 도시락은 싸주마.
- 엄마! 대학 네임벨류가 바뀌어야 내 인생이 바뀌지. 나보고 삼류대나 다니라는거야?
- 삼류대? 그게 네 실력이야. 그리고 그 대학 졸업해서 학교 선생하는 사람도 있고, 대기업 다니는 사람도 있어. 가서 열심히 할 생각을 해야지.
- 아, 몰라! 이번에도 수능 망치면 다 엄마 탓이야!
- 어이구. 나중에 돈 지켜줘서 엄마한테 고맙다는 소리나 하지 말어.
고등학교 2학년때까지 게임이나 하며 놀던 희철은 고3이 되면서 정신을 차린 케이스였다. 문제는 1년 공부한다고 해서 지난 세월의 공백이 메꿔지지는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고3과 재수 때까지는 기숙과 기숙의 남편도 하나뿐인 아들이 공부하겠다는데 있는 힘껏 밀어주겠다는 각오가 대단했다. 하지만 공부가 길어지고 성적이 확 오르지는 않다보니 아들의 한계를 인정하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고 지갑이 닫혔다. 기숙은 군대에서 목숨과 바꾸며 번 돈을 헛되이 날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돈은 희철이 복학했을 때, 대학을 다닐 등록금으로만 쓰여야했다.
희철은 부모의 지원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아들이 공부를 안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정신차리고 공부 좀 한번 해보겠다는데 나몰라라할 부모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스로 학비를 벌어 대학원에 진학하고, 타국에서 독학으로 외국어를 공부하고, 도리어 부모에게 돈을 보태는 또래의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 꿈을 지원해야할 가장 큰 스폰서는 나 자신이 아닐까? 어쩌면 나는 가장 큰 후원자로서의 책임은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며칠 후, 미주는 조용한 민박집에서 평소 즐겨듣는 음악을 들으며 여유있게 청소와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 민박집을 아침 저녁으로 복작복작 채우던 희철과 구 봉사단원들은 이날 오전 일찍 런던으로 떠났기 때문에 모처럼 민박집을 돌보며 여유있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희철은 구 봉사단원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파리 시내 관광을 다니며 부쩍이나 친해졌다. 비슷한 또래이기도 했고, 최저 경비로 여행한다는 모토까지 통한 다섯 사람은 하루종일 걷느라 퉁퉁 부은 다리를 하고서는 민박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 누나, 나 4일 휴무 말이야. 이번에 런던가는데 써도 될까? 수희 누나도 그렇고 같이 가면 좋겠다고 해서. 일정은 다 짜여있어서 나는 따라다니기만 하는 것도 좋고.
희철은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웠는지 구 봉사단원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런던 여행에 동행했다. 다행히 수희 일행이 예약한 호스텔의 남성 도미토리에 자리가 있어서 희철은 큰 준비 없이 런던 여행을 바로 떠날 수 있었다. 4일 간의 런던 여행을 마치고 수희 일행은 인천행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희철은 다시 기차를 타고 파리로 돌아오는 것이 계획이었다.
수희 일행의 침대 시트와 수건 빨래 외에 크게 할 일은 없었는데, 이틀 전에 체크인 한 장기숙박객을 제외하고는 이틀 동안 다른 손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없는 민박집에 흐르는 2000년대 유행했던 여유로운 R&B 음악의 템포에 맞추어 수건을 개고 침대 매트리스 커버를 교체했다. 잠시 빨래가 건조될 때까지 시간이 빌 때는 커피를 마시거나 화분에 물을 주며 모처럼 한가로운 오전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스포티파이 AB(spotify AB)라는, 세계 최대의 온라인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 회사의 매니저인 아제이 칼리아가 회사가 보유한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분석한 일이 있었다. 사람들이 평균 33세부터 더는 새로운 음악을 듣지 않는다는흥미로운 점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미주는 이 기사를 읽으며 마치 자신의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주가 즐겨듣는 음악은 팝송이건 K-pop이건 2000년대 중반 어딘가에서 멈춰있었기 때문이었다.
'웅.'
[som_som_ 님이 bijou_minbak 님을 언급했습니다.]
그때, 핸드폰으로 알림이 울렸다. 이제 막 런던에 도착한 다솜이 또 민박집 계정을 태그해서 영상을 올린 모양이었다.
"삐까~ 삐까삐까~ 삐까~ 삐까삐까~"
클릭해보니 낯선 음악에 맞춰 다섯 사람이 런던 타워브릿지 앞에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영상이 나왔다.
"풋."
그 모습을 본 미주는 웃음이 나왔다. 파리에서 새벽같이 출발해 피곤할텐데 언제 호스텔에 들려 짐을 맡기고 바로 관광을 시작한 것인지. 그 체력이 놀라웠고 다른 사람의 시선은 신경쓰지 않고 춤을 추는 모습도 재미있었다.
다솜은 파리를 여행하면서도 재미있는 영상을 만들어 올렸고, 그 때마다 민박집 계정을 태그하는 바람에 미주는 매번 영상을 보게 되었다. 짧지만 신나는 음악과 여기에 맞춰 반복되는 춤을 추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대부분 처음 듣는 음악이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자꾸 듣다보니 귀에 익기도 하고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음악도 있었다. 미주는 음악이 꽤 신나고 괜찮다는 생각을 하며 하트를 꾹 눌러주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화분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민박집에는 미주가 늘 듣던 2000년대 R&B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 번 음악을 바꿔볼까?'
미주는 다솜이 사용했던 음악 몇 개를 검색해서 플레이리스트로 만들어 틀고는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새로운 음악은 늘 반복되던 일도 새롭게 느껴질만큼 주의를 충분히 환기시켜주고 있었다. 민박집을 운영하다보면 다양한 연령층의 손님들, 특히 20대를 많이 만나게 될텐데 음악부터 시작해 기존에 미주가 가지고 있던 취향의 틀을 바꿔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엄마도 자신만의 틀을 내려놓지 못해서 세대가 다른 자식을 힘들게 했는지 몰라.'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6.25 전쟁을 경험한 분들이었다. 그 분들의 목표는 오직 자식들의 배를 곯이지 않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 외갓집에 가면 광주리에 산더미 같이 전을 부치고, 저녁내내 송편을 빚었던 기억이 났다. 그 분들의 목표는 오직 잘 먹는 것 하나였다.
고성장시대의 혜택은 안타까울만큼 외가댁을 아슬아슬하게 비켜갔다. 대학을 나오기만 하면 취업이 보장되었지만 대학에 들어갈 돈이 없었다. 집값과 땅값이 폭등했지만, 폭등 전 땅을 살 돈이 없었다.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을 지나 빈부의 격차가 생겨나는 동안 엄마가 머무는 곳은 변함없는 저 아래였다.
- 대학을 보내줬잖아! 엄마는 대학 입학도 못해보고 돈 벌어야했어!
- 네가 아침마다 도시락 싸봐라.
- 너가 한번 식당 나가서 일해봐라. 어디 사람 취급이라도 받는 줄 아니? 너가 호주 카페에서 일하는 건 '아, 젊은 애가 영어 배우러 왔구나'라고 생각하지만, 엄마가 식당 가서 일하면 '오죽 남편이 못나면 여자가 이런 일을 할까'하고 바라보고 무시한다.
20대 때 듣던 음악에 멈춰버린 나처럼 어쩌면 엄마도 자신의 90년대에서 생각이 멈춰버려 빠르게 바뀌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자녀를 이해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았다.